마지막 축제

스톨러는 CEO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세가의 다음 단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가의 차세대 시스템이 새턴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드웨어 구조는 단순해야 하고, 개발자들이 다루기 용이해야 하며, 성능은 강력해야 했다. 세가는 새턴의 실패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예전 칼린스키가 그의 차세대 기기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을 때 비웃음으로 일관했던 그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칼린스키가 옳았다는 것을 이제는 그들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스톨러는 칼린스키에 비해 세가 임원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칼린스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한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을 거둔 시점에 소니에서 근무했다는 그의 경력으로 인해 아마 그는 저보다 더 큰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드림캐스트라고 명명되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세가는 하드웨어 개발팀을 둘로 나누게 된다. 초기 "화이트 밸트"라고 불리다가 "카타나"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팀은 메가 드라이브를 만든 사토 히데키를 리더로 하는 일본 개발팀이었으며, 초기에 "블랙 밸트" 이어 "듀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개발팀이 구성된 것이다. 두 프로젝트 팀은 완전히 개별적으로 각각 새로운 하드웨어 개발에 착수했으며, 세가는 이 중에서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는 시스템을 선택할 예정이었다.

미국 개발팀은 미국산 부품을 사용하여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 중심에는 PC게임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3dfx 칩셋이 있었다. 반면 일본 개발팀은 히타치 CPU와 NEC 그래픽 칩 등 일본산 부품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3dfx는 자사의 칩셋을 대중에 공개하면서 세가와의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을 누설하는데, 많은 이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3dfx를 기반으로 한 미국 개발팀의 시스템이 최종적으로 세가 경영진의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톨러에 따르면, 최종 결정은 철저히 기술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드웨어에 대한 사항이 결정되고, 이제는 소프트웨어를 마련할 시기였다. 새턴이 오랜 수명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이로 인해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용 게임들을 개발할 시간과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카 유지의 소닉 팀은 완전히 새롭게 3D로 재구성된 소닉 타이틀의 개발을 일찍부터 시작할 수 있었고, 스즈키 유 역시 셴무 프로젝트를 새턴에서 드림캐스트로 옮겨가면서 그가 생각하는 원대한 구상에 걸맞는 하드웨어 성능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북미에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스포츠 게임 시장의 탈환을 위해, 세가는 비주얼 컨셉츠를 인수한다. 스톨러는 비주얼 컨센츠가 플레이스테이션용 미식축구 타이틀을 개발하던 시기에 이미 그들과 안면이 있었는데, 비록 그 당시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지만 비주얼 컨셉츠가 EA와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개발사라고 믿고 있었다.

서드파티 개발사들을 포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분야야 말로 버니 스톨러의 전공이었다. 드림캐스트가 새턴과는 다른 매력적인 하드웨어라는 점이 인식되자 남코, 캡콤, 미드웨이 등 아케이드 게임 개발사들이 서드파티로 참여하여 세가 하드웨어가 전통적으로 보유한 아케이드 게임에서의 강점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EA는 끝까지 드림캐스트의 서드파티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많은 팬들은 이를 드림캐스트의 가장 큰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EA의 불참을 둘러싼 여러 추측들이 있는데, 버니 스톨러는 이에 얽힌 속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 EA CEO] 레리 프롭스트는 나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죠. 레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버니, 우리도 드림캐스트 서드파티로 참여하겠네. 하지만 우리에겐 스포츠 게임에 대한 독점권이 필요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죠. '그 얘기는, 드림캐스트가 EA를 제외하고는 스포츠게임 서드파티가 전혀 없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저는 이어서 이렇게 제안했어요. '이보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나는 이미 천만달러를 들여 비주얼 컨셉트라는 개발사를 인수했네. 이들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거야.' 레리의 이를 거부했죠. '그건 곤란한데. 비주얼 컨셉트와의 경쟁도 인정할 수 없어.' 결국 저는 이렇게 결론을 지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럼 말일세, 레리. 우리는 드림캐스트에 관해서는 협력관계가 될 수 없을 것 같군." - 버니 스톨러


EA와 세가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스톨러는 EA의 협상 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한 조건 자체를 내걸 수 있는 전략적 판단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EA와 진행했던 또 다른 협상 역시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세가는 비주얼 컨셉트가 EA의 가장 큰 무기인 메든 프랜차이즈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평론가들 중 몇몇은 비주얼 컨셉츠의 게임을 EA보다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니, 그들의 믿음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은 아케이드 시장에서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세가는 드림캐스트와 설계 사상을 공유하는 아케이드 하드웨어를 사전부터 준비해 나갔다.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델 3 보드의 보급형 후속 하드웨어를 세가 아케이드 게임 개발의 중심에 놓은 것이다. 세가는 이전부터 가정용 게임기를 기반으로 하는 아케이드 보드를 내놓곤 했지만, 이 보드들은 그저 인기 콘솔 게임을 저렴하게 이식하는 데에만 한정적으로 쓰였을 뿐이었다. 나오미는 달랐다. 세가 뿐만 아니라 아케이드 서드파티 개발사들에게도 호응이 좋았던 나오미는 향후 네오지오 보드와 함께 역사 상 가장 인기있는 아케이드 하드웨어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스톨러에게는 드림캐스트를 다른 어느 가정용 게임기와 차별화시키기 위한 숨겨진 카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는 드림캐스트에 모뎀을 기본으로 장착하길 원했던 것이다. 울티마 온라인으로 온라인 게임의 강력한 잠재력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던 시점에 스톨러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본 본사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들은 스톨러가 가진 비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드림캐스트의 일본 발매는 1998년 11월에 이루어졌으나 이번에도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다른 세가 게임기들처럼 동시발매 타이틀이 너무 적었고, 그나마 주목 받았던 버추어 파이터 3는 외주 제작으로 인해 그 퀄리티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소닉 어드밴처가 드림캐스트 발매 한 달 후인 크리스마스 즈음에 등장하여 드림캐스트의 판매량을 견인했지만, 판매량 증가는 생각보다 더디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9년 9월 9일 (9/9/99) 미국 발매는 세가 팬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훌륭한 축제였다. 17개의 타이틀이 동시발매되었으며 그 중에 NFL2K는 진정한 차세대 미식축구 게임의 진면목을 과시했고, 소울칼리버는 지금도 역사 상 최고의 격투 게임 중 하나로 회자되는 높은 퀄리티를 보여주었으며, 소닉 어드밴처는 과거 소닉의 명성을 다시금 부활케하는 인기를 얻었다. 동시발매 타이틀 중에는 옥석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워낙 다양한 선택을 통해 드림캐스트는 거의 모든 게이머들에게 발매 즉시 만족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드림캐스트의 미국 발매는 역사 상 가장 성공적인 콘솔 발매 행사로 기억되었으며, 세가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


(계속…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RSS로 구독하세요!   클릭!)

글: 트레비스 파스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09.4.21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 '눈물없인 볼 수 없는, SEGA의 역사' 1편부터 보기 (클릭)


추천(또는 View On)은 번역 작업의 효율성을 대폭적으로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