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린스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업계에 다양한 연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소니였다. 세가와 소니는 세가CD 개발을 통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소니는 세가 덕분에 게임 소프트웨어 비지니스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닌텐도와의 작업이 무산된 이후, 소니는 게임기 분야에서 계속 사업을 진행할 계기를 찾고 있었다. 칼린스키는 소니와 진행되었던 당시의 논의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소니와 만나 바람직한 차세대 하드웨어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그 와중에 세가-소니 공동 작업을 통한 하드웨어 시스템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하드웨어 부분에서 적자가 발생하면 양 사가 손해를 분담하는 대신, 소니가 발매하는 게임에 대해서는 수익을 100 퍼센트 소니가 갖고, 세가가 발매하는 게임은 마찬가지로 세가가 모든 수익을 갖는 방식이었어요. 소니에 비해 세가의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력이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조건이 세가에게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일본으로 날아갔고, 소니 중역들은 이 아이디어를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가 본사로 가보니 나카야마는 이러한 제안을 싫어하더군요. (웃음) 그래서 이 논의는 거기서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모두들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논의했던 바로 그 컨셉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모태가 된 거죠." - 톰 칼린스키



그렇다. 세가에겐 향후 자사의 콘솔과 가장 큰 경쟁자가 될 두 시스템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일본 세가 본사에 의해 두 기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나카야마는 고집 센 상사로 유명했는데, 임원들에게 폭언은 물론 폭력도 행사하는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미국 지사의 성공을 높이 평가했으나 이러한 평가로 인해 일본 본사의 많은 이들은 나카야마가 미국 지사를 편애한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미국 지사의 간섭이 들어올 때마다 자존심을 세우며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했다. 칼린스키 역시 비슷한 추측을 했다. "일본 본사의 중역 중에는 미국 지사의 중역들에 대한 나카야마의 편애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아마 많은 일본 중역들이 질투심을 느꼈던 것 같고, 이러한 상황이 그들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하드웨어를 찾고자 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 지사도 새턴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 본사에서 제네시스에 대한 지원을 끊고 새턴에 회사의 모든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상황은 다시 심각해졌다. 이러한 결정은 메가 드라이브가 애초에 큰 히트를 치지 못했던 일본에서는 타당한 결정이었지만, 그리고 이전 세가 게임기들 역시 후속 시스템이 등장하자마자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제네시스는 여전히 미국 시장에서 가장 높은 시장점유율을 가진 게임기였고, 그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차세대 기기들은 아직 출시까지 긴 시간이 남은 터였다. 닌텐도마저 돈키콩 컨트리 시리즈나 요시 아일랜드와 같은 게임들로 슈퍼 닌텐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시점에서 제네시스를 포기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칼린스키는 그 때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난 정말 솔직히 말해서 새턴을 아예 발매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러나 차세대의 물결은 이미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94년 당시에도 이미 3DO와 아타리 제규어가 게이머들에게 차세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세가의 R&D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과 맞서기 위해 (그리고 슈퍼패미콤을 견제하기 위해) 그래픽 성능을 개선하고 동시 발색 능력을 향상시킨, 기존 제네시스의 저렴한 업데이트 버전인 제네시스 2를 시장에 내놓고자 했다. 미국 세가의 R&D 책임자였던 조 밀러는 제네시스 2가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업그레이드라면 보다 더 게이머들에게 와닿는 기능 향상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업그레이드는 모든 제네시스 유저들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나중에 32X라는 이름이 붙는 새로운 상품의 개발을 진행하게 된다.


사실 제네시스 2나 32X 모두 딱히 훌륭한 발상은 아니었다. NEC가 이미 터보그라픽스에서 그래픽이 향상된 업그레이드, 슈퍼그라픽스로 처절한 실패를 맛본 바 있고, 제네시스에는 이미 세가CD라는 거추장스러운 주변기기가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조 밀러는 새턴의 아키텍처를 차용하여 제네시스를 완벽한 32비트 게임기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주변기기를 만들고자 했다. 새턴의 미국 발매에 맞추어 소프트웨어를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32X는 세가로 하여금 새턴이 등장하기 전 32비트로의 개발 작업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32X는 사실 마케팅을 위한 미끼에 불과했어요." 칼린스키는 후회섞인 목소리로 인정했다. 32X는 경쟁자들에게서 관심을 빼앗고 세가를 32비트 세대로 편입시키고자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지, 기기 자체를 오랫동안 지속시킬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가는 조용히 하도급 개발사들을 고용하여 빠르고 저렴하게 게임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세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언급하지 말라는 조건 하에. 그 덕분에 32X의 게임 리스트는 괜찮은 게임들부터 엉망인 게임들까지 그 편차가 심했다. 많은 서드파티 게임들은 단순히 제네시스 게임에 다른 색상들만을 입힌 재활용품이었고, 덕분에 32X는 기존 하드웨어에 큰 향상을 가져오지 않는 주변기기로 (잘못) 인식되고 말았다.

32X는 새턴이 등장하기 전 간극을 매우는 도구(트립 호킨스에 따르면 '반창고')였지만, 그 간극이 고작 7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비자들에게 혼란만을 불러 일으킬 뿐, 긍정적인 성과는 별로 이루어내지 못한 제품이었다. 또한 32X를 믿고 구매한 게이머들은 세가의 행보에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32X는 시장에서 결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만약 잘 팔리기라도 했다면, 세가의 팬들은 아마도 32X파와 새턴파로 양분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진 않지만, 세가 내부에서는 또 다른 시스템이 개발되고 있었다. 세가는 당시 닌텐도의 게임보이가 차지하던 시장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고, 게임보이는 판매량에 있어 정체기를 맞고 있었다. (아직 포켓몬스터가 나오기 한참 전 이야기이다.) 세가에서 새로운 휴대용 게임기를 발매한다면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칼린스키에 따르면, 세가에서 개발 중이었던 휴대용 게임기는 16비트 그래픽, 상당한 품질에 높은 해상도를 갖춘 스크린, 그리고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까지 갖추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이러한 스펙은 이상에 가까웠다. 시장에 내놓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칼린스키의 기억에 따르면 298달러 정도였다.) 세가는 이 휴대용 게임기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결국 제네시스의 휴대용 버전인 노마드만이 게임 기어의 유일한 후속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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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레비스 파스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09.4.21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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