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없인 볼 수 없는, SEGA의 역사

게임라이프/번역 2009. 5. 12. 16:54 Posted by 페이비안

과연 우리는 세가와 같은 회사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콘솔 제작사로서의 영광은 이미 옛 이야기이고 그 이름이 한 때 상징했던 존재감도 이젠 찾기 힘들지만, 게임 산업은 예전의 거인 세가 없이 이토록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혁신의 중심이자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던 그 이름 SEGA는 그동안 걸어온 행적만으로도 게임 역사 상 가장 위대한 개발사의 자격이 차고도 남는다. 

라이벌인 닌텐도가 소수의 블록버스터급 시리즈를 꾸준히 유지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과 달리, 세가는 언제나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창조해왔다. 그들은 이미 히트했던 시리즈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음에 만들 완전한 오리지널 신작이 예전 시리즈를 뛰어 넘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언제나 확신했기 때문이다. 도쿄, 샌프란시스코, 리온 등 전 세계에 걸친 세가의 개발 스투디오에는 항상 모험가 정신이 가득했고 개발자들은 운명을 건 도박을 서슴치 않았다. 팬들에게 있어, 그들은 언제나 진정한 승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가는 하드웨어 시장에서 제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별로 없었다. 게임 콘솔에 얽힌 그들의 역사는 수많은 시행착오로 뒤덮여 있다. 그 중 몇몇은 잘 알려진 것이며, 몇몇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들이지만, 이러한 모든 시행착오는 돌이켜봐도 참으로 안타까운 것들이었다. 그들이 시장의 정점에 섰던 몇 년 동안은 그들이 노력한 시간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는 다시 처절한 내리막길을 걷고 만다. 세가가 결국 하드웨어 사업에서 철수했을 때, 많은 팬들에게 이 사건은 독창성과 창의성이 거대 브랜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세가의 사업 방식은 확실히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아니었고, 서드파티로 남은 지금도  세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세가가 그 전성기를 뒤로 한 지금, 어떤 이들은 이들의 역사에 다른 색깔을 입히려고 하고 있다. 마치 그들의 성공이 우연에 불과했고 실패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역사책은 언제나 승자의 손에 의해 쓰여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여기 세가의 역사를 정리해본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그리고 일어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서비스 게임즈

세가는 사뭇 관계 없어 보이는 여러 갈래의 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이 서로 하나로 엮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가의 모습이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일본 정황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인력과 산업 모두가 초토화되어 경제 재건을 위한 미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회복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세가의 설립자들은 미국인들이었으며 그들의 행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에서 교차하게 된다.

마티 브롬리(Marty Bromley)는 1940년에 하와이 미군 기지에 슬롯 머신을 공급하기 위해 스텐다드 게임즈를 설립한다. 그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할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미군 기지의 슬롯 머신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이들과는 달리 그는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슬롯머신을 불법으로 규정한 1952년, 그는 떠오르는 일본 시장에서 사업 기회를 보았고, 정부로부터 슬롯 머신을 인수하여 일본에 수출하기 위한 회사를 설립한다. 그 회사의 이름은 서비스 게임즈였다.

비슷한 시기에, 데이빗 로젠(David Rosen)이라는 한 남자가 벤처 회사를 창업한다. 로젠은 뉴욕 출신으로 한국 전쟁 당시 일본에 머물렀었다. 그의 날카로운 비즈니스적 감각과 탁월한 결단력은 이후 그가 속한 회사에서 45년에 걸쳐 빛나게 된다. 공군으로 복무하는 동안 그는 일본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그 안에서 투자와 사업에 대한 기회를 발굴한다. 그의 사업은 일본의 경제 회복과 그 궤도를 같이 했는데, 첫번째 사업은 인건비가 미국인보다 훨씬 저렴한 일본 화가들을 고용하여 사진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 수출하는 것이었고, 다음에는 업무와 여행에 필요한 신분증에 쓰일 사진을 뽑아주는 사진 부스의 운영이었다. 미군 주둔으로 인해 더 많은 돈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자, 그는 이제 즐거움을 위한 사업에 도전할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전자기계 아케이드 게임을 수입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당시 미국에서 오락 기기 관련 사업은 핀볼 사업을 제외하고는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시절 아케이드 센터는 음침하고 불량한 장소로 여겨졌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소년 친화적인 공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미국에서 아케이드 기기들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여 일본에서 규제에 대한 큰 제약 없이 판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초기의 성공을 거둔 아케이드 비즈니스는 지금까지도 세가의 매우 중요한 사업 영역이다. 회사의 역사 전체에 걸쳐 아케이드 운영은 세가의 핵심이었으며 세가가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고전할 때에도 회사의 기술적 경쟁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마티 브롬리와 데이빗 로젠의 행로는 1964년 드디어 만나게 된다. 로젠 엔터프라이즈가 서비스 게임즈와의 합병을 협상하게 된 것이다. 합병의 결과로 Service Games를 줄여서 만든 이름인 SEGA 엔터프라이즈 Ltd.가 탄생한다. 두 회사의 합병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미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독특한 비즈니스 문화와 강하고 단단한 시장에서의 입지가 합쳐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 때 다른 경쟁자인 타이토 역시 합병되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서비스 게임즈가 SEGA의 모회사가 된 반면, CEO 자리는 데이빗 로젠이 맡아 1996년에 이르기까지 회사를 이끌게 된다.

1966년에 세가는 새로운 아케이드 머신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기 시작한다. 세가의 최초 아케이드 게임은 잠수함 테마의 페리스코프라는 슈팅 게임이었다. 이 거대한 아케이드 머신은 높이 3 미터에 폭이 2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에다가 플레이에 다른 기기의 두 배에 해당하는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지만 게이머들과 아케이드 운영자들 모두에게서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페리스코프의 성공으로 세가는 그들의 게임을 미국에 수출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회사 자체가 일본 기반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가는 걸프 엔 웨스턴에 인수되었지만 데이빗 로젠은 여전히 CEO의 자리를 유지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아케이드 산업은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전자기계 게임들과 핀볼 머신을 뛰어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개별적 논리 게임들을 대체하게 된다. 타이토가 1978년에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선보이자 일본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급변하는 게임 시장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세가는 샌디에고에 기반을 둔 그렘린 인더스트리즈를 인수하여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아케이드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이러한 인수가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가는 헤드 온이라는 게임을 선보이고 이 게임은 이후 팩맨으로 인해 유명해진 미로 추격 장르를 가장 처음 개척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세가는 나카야마 하야오가 운영하는 유통 회사를 인수한다. 인수 후 유통부문 부사장이 된 나카야마는 세가의 이야기에 있어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세가는 더욱 정교한 히트 게임들을 계속해서 만들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가를 규정하는 독특한 창의성의 바탕인 뛰어난 개발자들이 회사에 합류한다. 3D 그래픽에 대한 아케이드 게임의 초기 접근 방향을 보여주는 뛰어난 그래픽을 갖춘 세가의 게임에 대적할 경쟁 회사는 거의 없었다. '터보'는 최초로 풀 컬러 그래픽에 스프라이트 스케일링을 적용한 레이싱 게임이 되었으며 '젝손(Zaxxon)'은 스크롤 그래픽에 등각 시점(isometric view)과 3D 게임플레이를 접목한 게임이었다. '벅 로저스: 플래닛 오브 줌(Buck Rogers: Planet of Zoom)'은 높은 속도의 3D 스케일링과 디테일한 스프라이트를 동시에 선보였다. 이렇게 강력한 게임들을 통해 세가는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사업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게임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었고 세가 역시 이러한 흐름을 통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아케이드 산업은 또 한 번의 침체기를 맞게 될 예정이었다. 데이빗 로젠은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예측했고, 아케이드 산업의 개편을 촉구하는 한편, 아케이드 운영자들이 저렴하게 새로운 게임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컨버전 키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나중에 아케이드 산업이 다시 소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만, 당시 그의 생각은 비난과 경멸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로젠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아타리가 1983년에 하향 성장세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이 게임 산업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가의 모회사였던 걸프 엔 웨스턴(그 당시에는 파라마운트도 소유했었다.) 역시 회사를 처분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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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레비스 파스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09.4.21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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