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기술의 문제. 두 명의 전사가 각기 다른 격투 스타일로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만난다. 러시아 레슬러, 미국 복서, 인도 요가 마스터, 뉴욕의 건달, 정글의 몬스터 그리고 과묵한 마샬 아트의 대가까지. 어떤 종파의 무술이냐 라는 것은 중요치 않다. 누가 더 뛰어난 기술을 가졌는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그 뿐이다.


그들은 서로와 겨루기 위해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 세계를 방랑한다. 누군가는 해답을 찾아, 누군가는 영광을 찾아,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그리고 또 누군가는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자 싸울 상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만이 세계 최고의 스트리트 파이터가 될 수 있다.

라운드 1 - 파이트!

1982년, 코나미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오카모토 요시키를 그래픽 아티스트로 채용한다. 사실 당시 오카모토는 비디오게임 제작에 큰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디오게임 자체도 좋아하지 않았다. 2년 후, 그는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라는 회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타임 파일럿과 자이러스라는 슈팅 게임을 만들었고, 이에 더해 급여 인상까지 요구했다. 결과는, 다음 날 바로 해고 통보.

5년차 게임회사 캡콤이 그를 데려 갔다. 당시 캡콤은 전자 게임 기기에서 비디오 게임 쪽으로 사업 영역을 재편하는 중이었으며, 캡콤 R&D 파트에 디자이너 후나미츠 노리타카에 이어 두 번째로 고용된 오카모토는 캡콤의 초기 아케이드 히트작 중 하나인 세계2차대전 비행 슈팅 게임 1942를 개발한다. 후지와라 토쿠로의 코만도와 마계촌, 그리고 오카모토의 1942는 캡콤을 어엿한 메이저 게임 업체의 자리로 올려놓는 기반이 되었으며 북미 시장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 캡콤의 다음 행보는 오카모토를 옛 직장과의 한판 승부로 이끌게 된다.


1984년에 데이터 이스트는 기초적인 격투 게임인 카라데 챔프를 발매하였고, 코나미는 1985년 이얼쿵푸를 통해 흐름을 이어갔다. 캡콤 역시 격투 게임의 개발에 들어갔고 카라데 챔프와 이얼 쿵푸의 장점들만 모아 더 멋진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오카모토는 어벤져스를 개발한 디렉터 "피스톤" 니시야마 타카시와 프로젝트 플래너 "피니쉬" 마츠모토 히로시를 팀에 참여시켰고 당시 갓 입사한 22세 그래픽 디자이너 이나후네 케이지에게 캐릭터 디자인을 맡겼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소니 치바 주연의 1974년 클래식 영화 "격돌! 살인권"의 미국 개봉 시 제목을 따서 붙였다. 그렇게 완성된 스트리트 파이터는 1987년 아케이드에 처음 모습을 선보인다.

외형만을 놓고 보면, 니시야마와 마츠모토는 이얼쿵푸의 기본적인 컨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나후네는 70년대 만화책들과 특히 애니메이션 空手バカ一台를 참고로 하여 캐릭터들을 디자인하였다. 게이머는 하얀색 도복과 빨간 나막신을 신은 소토칸류 카라데 마스터 류를 조작하게 된다. 체력을 표시하는 바는 이얼쿵푸와 동일하고 전세계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10명의 파이터들 중 수리검을 던지는 닌자 소년 케키, 곤봉을 휘두르는 이글 등등도 이얼쿵푸의 캐릭터들과 유사하다. 이에 더해 중국 암살자 겐, 백인 펑크 버디, 마이크 타이슨을 모티브로 한 마이크, 타이 보스 아돈과 사카트, 외꾸눈 무에타이 마스터 레이바 등이 등장한다.

스트리트 파이터가 차별화되었던 점은 바로 이러한 기본을 바탕으로 한 디테일한 구성력에 있었다.


화면의 색감과 캐릭터는 이얼쿵푸의 캐릭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함을 보여주었다. 게이머는 처음 싸울 곳을 지정할 수 있었고, 싸움이 끝나면 매우 조악해서 오히려 멋졌던 디지털 음성이 승패를 알려준다. 더 멋진 것은 두번째 플레이어가 중간에 언제든 끼어들어 류의 미국 라이벌인 켄을 조작하여 첫번째 플레이어와 대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도전자가 승리할 경우, 그는 켄으로 계속 게임을 이어서 진행할 수 있다. 조스트와 마리오 브라더스가 이와 비슷한 개념을 몇 년 전에 도입했으나 그 어느 게임도 두 게이머 사이의 경쟁심을 이렇게까지 자극하지는 못했다. 스트리트 파이터는 상대를 때려눕혀 집으로 보내버리는 재미를 본격적으로 선사한 게임이다.

그러나 특수 공격은 불만스러웠다. 장풍류의 파동권이나 어퍼컷 스타일의 승룡권, 스핀킥 선풍각의 경우 한 두 방이면 적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나 조작이 너무도 힘들었다. 어떤 게이머들은 실제로 그러한 특수 공격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질 않았다. 류의 장풍 공격은 시행착오 끝에 이를 발견한 게이머에게서 다른 게이머에게로 전수되는 은밀한 비전같은 것이었다. 게임의 독특한 조작 방식은 특수 공격의 시전을 더욱 더 어렵게 했다.

스트리트 파이터에는 버튼 대신에 펀치 패드 두 개(하나는 펀치, 하나는 킥)가 있었고, 이 패드를 얼마나 빠르고 세게 치느냐에 따라 공격의 강, 중, 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8방향 조이스틱도 감도가 심하게 좋지 않은 데다가 게이머들은 강공격과 약공격이 어떠한 차이에 의해 달라지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게이머들은 패드를 미친듯이 두들겨 대는 방식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 관절이 삐거나 골절된 플레이어들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상이 실제였는지 단순한 소문이었는지 관계 없이, 펀치 패드 자체가 이러한 막무가내 조작을 오랫동안 버텨낼 리가 없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기기의 고장 빈도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게임의 메인 보드에는 일본 시장을 위한 두 번째 디자인을 수용할 준비가 미리 되어 있었다. 펀치 패드는 여섯 개의 버튼 조작 체계로 변경되어 다양한 공격이 한층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컨버전의 와중에, 조이스틱의 감도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스트리트 파이터는 일본에서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에서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캡콤 USA는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후속작의 개발을 본사에 요청한다. 후나미츠와 캐릭터 디자이너 야스다 아키라가 더블 드래곤 스타일의 사이드 스크롤 격투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89를 개발한다. 반면 메가맨이라는 대형 히트를 만들어 낸 후지와라 토쿠로는 바이오닉 켄이 등장하는 메트로이드 풍 플랫폼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2010: 더 파이날 파이트라는 게임을 패미콤용으로 개발하지만 순식간에 잊혀지고 만다. 스트리트 파이터 '89는 파이날 파이트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여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스트리트 파이터의 속편은 오카모토에 의해서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


(계속...)

글: 러스 맥러힌 / 번역: 페이비안 / 원문 게시일: 2009.2.16 / 원문 링크: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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