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더 넥스트 레벨

스포츠 게임에 집중하면서 닌텐도와의 정면 승부를 꾀했던 마이클 캇츠의 전략은 향후 제네시스의 성공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반이 되었지만, 그의 현실주의적인 경영은 나카야마의 원대한 야심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처음에 약속했던 연내 백만대 판매 목표를 맞추지 못한 것이 캇츠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나카야마와 세가 임원진들은 캇츠가 사장에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이미 그를 대신할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세가의 임원진들이 원했던 것은 다른 종류의 경영자였다. 진취적이고 열정적이며 그 자신의 꿈을 다른 이에게 세일즈할 수 있는 리더를 원했던 것이다.

톰 칼린스키(Tom Kalinske)가 바로 세가가 찾던 인물이었다. 장난감 산업 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베테랑 경영인인 톰은 상품을 아이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각인시켜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텔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인텔리비전을 굴지의 회사로 키워냈고, 게임 산업의 침체기 동안에도 회사가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는데 관여했었다. 1984년 세가는 회사의 재매각을 그와 논의한 적도 있었고, 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를 세가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인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톰은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사람들을 자기 의견에 귀기울이게 하는 매력을 가진 동시에, 필요할 때에는 냉정하고 엄격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도 있었다. 톰은 세가에서의 스카웃 제의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저는 당시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왠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더군요. 올려다보니 거기에는 나카야마 하야오씨가 있었죠. 그는 제게 '여기서 뭐하고 있는겐가'라고 물었고, 저는 '가족과 함께 해변에서 살을 좀 태우는 중인데, 그걸 당신이 방해하고 있네요.'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는 '일본에 나와 함께 가세. 가면 정말 멋진 기술들을 볼 수 있을거야.'라고 했고, 그래서 저는 그와 일본으로 가서 16비트 게임기의 초기 모습들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는 나중에 게임 기어라고 불리게 될 기기도 보게 되었죠. 그 당시에 내가 본 그 어떤 휴대용 게임기보다 훨씬 멋진 녀석이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세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죠. 이번에는 세가가 닌텐도와 게임 시장을 건 승부에서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정식으로 세가에 합류한 건 1990년 가을이었습니다." - 톰 칼린스키 



칼린스키는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CEO로 부임했다. 그가 인수인계를 받는 잠시동안 캇츠는 사장으로 남아 있었다. 칼린스키는 인텔리비전 이후로 비디오게임 산업 쪽으로는 경험이 부족했고, 처음 몇 달 동안은 상황을 조용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보냈다. 몇몇 사람들은 과연 그가 그들이 원했던 과감한 리더가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이러한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세가의 비즈니스 방식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내놓았다. 가장 먼저, 제네시스의 가격이 너무 높았다. 경쟁 기기가 싸고 오래된 NES라는 점을 고려하면, 189달러의 가격으로는 '부잣집 애들이나 살 수 있는 게임기'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세가의 광고가 별로 핵심을 짚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칼린스키는 '아케이드를 집에서 즐긴다'라는 전략이 세가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제네시스만의 경험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네시스에 번들로 포함되고 있는 수왕기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수왕기 대신 개발 중인 블록버스터 게임, 소닉 더 헤지혹을 제네시스 번들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을 정리한 후, 칼린스키는 일본으로 가서 나카야마 하야오와 세가 임원진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가격을 내린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이며, 아케이드에 대한 포커스를 줄인다면 자사의 가장 큰 강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닉 더 헤지혹을 번들로 포함할 경우 포기해야 하는 엄청난 이익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칼린스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세가 임원진들은 자기들끼리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저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가면서 나카야마씨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방에 있는 누구도 자네의 말에 동의하지 않네.' 그래서 저는 '그래 뭐 좋아. 짧았지만 좋은 경험이었지. 다음 일자리나 찾아봐야겠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카야마씨가 이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현 상황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 자네를 고용했네. 그러니 가서 생각대로 진행하게나. 비용은 이쪽에서 책임지겠네.'" - 톰 칼린스키



나캬야마는 칼린스키를 신용했고, 그의 방식대로 진행하는 것을 허가했다. 제네시스의 프로세서가 가진 기술적 장점을 차분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닌텐도에 큰 충격을 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세가는 "Welcome to the Next Level"이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통해 많은 게이머들이 지금도 기억하는, 기술적으로 뛰어남은 물론 약간은 거만한 느낌마저 풍기는 세가의 독특한 회사 이미지를 널리 퍼뜨리게 된다. 게임 기어 광고는 게임 보이 유저들을 깔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고, '폭풍같은 연산능력' 같은 강렬한 카피가 달린 제네시스 광고는 제네시스야말로 액션 게임 팬들을 위한 유일한 게임기임을 강조했다. 과연 제네시스가 실제로 액션 게임에 있어 강점을 가진 하드웨어인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이들이 지금도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만을 보더라도 세가의 광고 전략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에도 불구하고, 세가는 여전히 유통 업체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 닌텐도의 독점은 대단한 것이어서, 다른 경쟁업체의 시장 진입 자체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월마트, 타겟, K-마트 등 메이저 유통 체인들 모두가 제네시스의 입점을 거부하고 있었다.

월마트에게서 입점 허가를 받기 위해, 칼린스키는 한 가지 묘수를 내놓았다. 세가에게 너무 질려서 차라리 제네시스를 입점시키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을 택하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월마트의 본사가 있는 알칸사스 주의 벤톤빌에서, 세가는 쇼핑몰 내에 매장을 하나 임대하여 그 안을 최신 세가 게임들의 시연대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지역 게시판의 광고면, 라디오 광고 시간, 지역 대학 미식축구장 광고판을 모두 세가 광고로 채워 그 지역의 십대들이 세가 매장으로 몰려들어 몇 시간이고 게임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하고 나니, 월마트 유통 부사장인 더그 맥밀란한테서 제게 전화가 오더군요. '제발, 월마트에 제네시스를 입점시켜 줄테니 그만 좀 해두시오.'라고 말이죠. 지역 커뮤니티에서 그에게 이 사태를 해결하라는 항의가 빗발친거죠." 칼린스키의 전략은 성공했다.


서드파티 개발사들의 지원 역시 문제였다. 세가의 새로운 게임기의 성공 여부에 대한 우려로, 제네시스에 대한 지원을 공표한 일렉트로닉 아츠의 주가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통 업체들이 제네시스를 입점시키기로 하고 공격적인 광고가 사람들에게 먹히기 시작하자, 이 문제도 쉽게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과 북미 양 쪽에서 다양한 서드파티 개발사를 확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라이센싱 부사장 토요다 시노부의 역할이 컸다. 유럽 개발사들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아미가 하드웨어와 부분적으로 비슷한 점을 공유하는 제네시스에 대한 게임 개발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제네시스에 있어 최고의 지원군은 1991년 여름에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에 동시에 등장한 소닉 더 헤지혹이었다. 칼린스키가 원했던 대로, 소닉 더 헤지혹은 149 달러로 가격이 인하된 새로운 제네시스 번들에 포함되어 슈퍼 마리오 월드가 번들로 포함된 199 달러 슈퍼 닌텐도 (슈퍼패미콤)가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출시되었다. 양 사의 번들 게임은 모두 훌륭했지만, 소닉이야말로 세가의 새로운 전략에 딱 맞아떨어지는 캐릭터였다. 슈퍼 마리오 월드가 8비트 시절의 원작에 매우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반해, 소닉은 화려한 액션과 숨막히는 속도감으로 가득했다. 많은 구경꾼들에게 있어, 소닉에 비교한 마리오는 한물 간 게임처럼 보였다.


슈퍼 닌텐도가 북미에 발매될 무렵 세가는 이미 터보그라픽스-16을 무참히 격파하고 16비트 마켓에 성공적으로 안착해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기 전쟁은 치열했다. 미국 지사의 전략을 받아들이기에는 일본 본사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치 않았던 탓에 일본 시장에서는 여전히 세가의 입지가 크게 확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메가 드라이브는 NEC의 터보그라픽스와의 경쟁에서도 뒤쳐지게 되었고 슈퍼패미콤의 발매는 메가 드라이브에 있어 마지막 결정타였다. 일본에서도 세가의 예전 두 게임기들보다는 메가 드라이브가 조금 더 성공을 거두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북미와 유럽 시장이 세가의 새로운 게임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세가의 반격은 화려했고, 결국 전세계 게임 시장에서 닌텐도의 시장점유율을 추격하게 된다. 드디어 세가가 왕좌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게임 업계의 슬픈 점 중 하나는 바로 영원한 승자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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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레비스 파스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09.4.21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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