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으로 진입하다

아타리의 몰락이 게임 산업 전반에 미친 파장의 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를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비디오게임 역사에 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1983년의 시장 붕괴'이지만, 사실 일본 시장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케이드 게임 매출이 침체에 접어든 1982년 초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북미의 콘솔 시장을 배경으로 당시 아케이드의 두 거인이었던 세가와 닌텐도는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개척지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 후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20년이 넘게 계속되어 간다. 

일본의 콘솔 비지니스는 아직 초창기였고, 북미에서 아타리 VCS가 거두었던 정도의 큰 성공을 이룬 게임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닌텐도와 세가는 거의 동시에 가정용 게임기를 만드는 데 착수했으며, 사실 두 회사의 첫번째 가정용 게임기는 같은 날인 1983년 7월 15일, 금요일에 함께 출시되었다. 닌텐도가 내놓은 게임기의 이름은 패밀리 컴퓨터(줄여서 패미콤)였고, 세가 게임기는 SG-1000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했다. 세가의 게임기가 15,000엔, 패미콤은 그보다 200엔 싼 14,800엔으로 둘 다 상당히 저렴한 편에 속했다.



누가 이 승부에서 승자가 되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SG-1000은 세가가 아케이드 게임에서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기술력을 보여주기는 커녕, 시장에 존재하는 부품들을 짜맞추어 실제로는 구형 코레코비전이나 MSX 컴퓨터 정도에 불과한 초라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닌텐도의 패미콤에는 멀티컬러 스프라이트 기능과 함께 하드웨어 스크롤링 기능이 포함되었는데, 80년대 초반 아케이드 게임의 단일 화면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게이머들에게 하드웨어 스크롤을 통한 화면의 전환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당시에는 사실 그 잠재력이 크게 주목받지 않았지만, 화면 스크롤은 향후에 3D로의 전환처럼 비디오 게임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게 된다.

여러 매체에서 앞다투어 비디오 게임을 한물 간 유행처럼 다루는 한편 아케이드 시장이 1983년의 몰락에 앞서 전반적인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걸프 엔 웨스턴은 세가를 인수한 것을 상당히 후회하게 되었고, 세가의 창업자였던 데이빗 로젠에게 회사를 380만 달러에 다시 인수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이러한 금액은 로젠 혼자서 조달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그러나 그는 세가가1983년 한 해 동안 올린 2억 달러가 넘는 매출에 더해, 현재의 게임 산업이 보여주는 하향 트랜드에도 불구하고 세가는 충분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회사라고 판단했다. 로젠과 그의 파트너들은 회사를 인수해 줄 회사들을 물색했지만 마땅히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결국 로젠과 나카야마는 자체적으로 스폰서 조직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오카와 이사오가 회장으로 있는 CSK 홀딩즈라는 그룹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롭게 독립적인 일본 법인으로 탄생한 세가의 CEO에는 나카야마가 추임되었으며 데이빗 로젠은 LA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사회의 운영과 북미 지역의 수출 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로젠과 나카야마는 독특한 파트너십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들의 우정과 경쟁은 세가의 전성기를 이끈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로젠은 회사의 구조적인 부분을 계획하는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던 반면 나카야마는 대담하고, 열정적이며 또한 냉혹한 리더였다.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일 때에도 서로 경쟁적이었으나 한 편으로 언제나 서로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시장이 코모도어 64나 ZX 스펙트럼 등 가정용 컴퓨터를 중심으로 전개되자 세가에서는 SG-1000 Mark II와 함께 기존 게임들과의 호환성을 유지한 채 키보드 기능이 부가된 SC-3000을 내놓으며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뉴질랜드와 타이완에서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 다른 지역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기록하게 된다.


SG-1000은 시장 점유율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세가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새롭게 설립된 콘솔 R&D 디비전에서 세가의 가장 위대한 크리에이터들이 SG-1000 하드웨어를 가지고 그들의 첫번째 게임들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즈키 유는 SG-1000 아케이드 하드웨어로 그의 첫 게임인 챔피언 복싱을 만들었으며 소닉의 아버지인 나카 유지도 걸즈 가든으로 게임 제작에 데뷔했다. 본질적으로는 램만을 추가한 코레로비전의 재구성에 불과했던 기기로 세가의 개발자들은 매우 인상적인 게임들을 만들어냈다. 기초적인 다중 스크롤을 선보인 오거스(Orguss)나 복잡한 퍼즐의 도키 도키 팽귄 랜드 같은 게임들은 기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3D 아케이드 슈팅 줌 909(벅 로저스)의 깔끔한 가정용 이식작 역시 세가 개발진의 저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세가는 SG-1000을 통해 향후 가정용 시장 공략을 위한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SG-1000 자체가 시장 상황이나 다른 여러 요인들로 인해 실패를 맛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세가는 닌텐도와의 판매량 승부보다 훨씬 더 값지고 중요한 경험값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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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레비스 파스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09.4.21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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