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풍경 하나에 홀린 잡담

게임라이프/소감 2009. 9. 28. 16:19 Posted by 페이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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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보다 놀라운 것은 고현정이 등장한 닌텐도 게임의 광고가 스크린도어의 광고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을 국내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물론 현대나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잠깐 국내에서 콘솔 사업을 벌인 적은 있었지만, 그리고 대원이라는 곳에서 게임보이 관련하여 뭔가 하긴 했더랬지만, 기본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 2가 등장하는 2000년 이전까지 한국은 콘솔게임과 관련하여서는 공식적인 시장이 거의 없던 불모지였다.

비록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국내에서 정식으로 콘솔들을 출시하면서 비디오게이머의 저변도 조금 넓어지긴 했지만, 스타와 리니지, 카트라이더 등 온라인 게임이 대세인 한국에서 비디오게임은 아직 '일반인의 취미'라고 하기는 힘들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국내 정식 발매하는 게임들 중 일부에 대해서만 한글화를 하고 있는 점도 그네들이 이러한 시장 상황을 현실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짜피 일본어와 영어를 배워가면서까지 게임을 해왔던 '게이머'들은 아예 발매가 안되서 국외판 어렵게 구하느니 비한글판이라도 구매를 할테니까.

하지만 닌텐도는 발매 소프트 수가 해외에 비해 턱없이 적어서 소프트 가뭄이라고 많은 이들이 투덜거려도 고집스럽게 발매하는 모든 게임을 한글판으로 내놓는다. 그 덕분에 슈퍼마리오, 위 피트, 젤다의 전설 등등 닌텐도의 글로벌 히트 상품들이 국내에서는 한참 후에나 나왔지만, 그로 인한 일부 유저들의 불만에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아마도 닌텐도는 잘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발매일 타령하는 이들은 닌텐도 코리아에서 정발을 내는 내지 않든 어짜피 그 게임을 어떻게든 구해서 플레이할 '게이머'라는 것을. 그네들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건 그네들이 열심히 부추기지 않으면, 그 게임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스쳐 지나갈 그런 '일반인'을 붙잡는 것임을.

그런 관점에서 저 광고판은 그 위치와 모델, 제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닌텐도의 생각을 온 몸으로 외친다. 이 게임은 선덕여왕을 즐겨 시청하고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게임이라고. 집에 가면 TV 화면에서도 외친다. 저 게임은 또한 1박2일을 재밌게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음악과 리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게임이라고. 

참 대단하다. 과연 이곳 저곳에서 한번쯤 성공 사례로 제시될 정도로, 닌텐도의 통합 마케팅은 전략에서부터 실행까지 철저하게 일관적이면서도 세련되다. 닌텐도의 글로벌한 전략인, 지금까지 게임을 즐기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다가선다는 목표가 한국에서는 이러한 식으로 변주되어 실행되는 것일테다. 세미나에서 들었던, 닌텐도 담당자가 말했다는, '아니오, 우리는 용산에서 성공하지 않을 겁니다. 우린 먼저 마트에서 성공할 겁니다.'라는 말, E3 컨퍼런스의 멋스러운 프리젠테이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광고는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메시지 자체의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음을 떠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자체는 배울 점이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낯설다. 어느 정도는 닌텐도 때문에 이런 대세에서 벗어난 마이너한 취미를 갖게 되었음에도, 국내에서 비디오게임 시장이 활성화되어 너도 나도 즐기는 취미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왔음에도, 정작 한국에서 비디오게임 붐을 주도하는 닌텐도의 전략에 나 자신은 메인 타겟층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쬐끔은 쓸쓸하기도 하고. (리듬천국 물리도록 했는데, 한국판 나왔다니 또 살까 생각하는 걸 보면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가.. ㅋ)

역시 게임은 재미있다는 생각도 든다. 게임 자체도 재밌지만, 패미콤 시절, 광고는 커녕 케이스나 설명서 따위도 없이 팩만 달랑 있어 소위 '알팩'이라고 불리는 팩 겉면에 붙여진 꼬부랑 글씨와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어떤 게임일지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려보았던 그런 경험도 재밌있고, 한 줌도 안되는 국내 비디오게이머들끼리 정작 기업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땅에서 플스가 좋니 새턴이 좋니 핏대 올리며 싸우는 모습을 보던 것도 재밌었고, 지금은 고작 광고판 하나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쨌거나 내게 게임은 여전히 현실에서의 짐들을 잠깐 내려 놓고 빠져드는 공상의 장으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이 광고판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요즈음에는 게임을 즐기는 것 자체에 더해 옛날 게임 추억하기와 게임회사 비즈니스 곁눈질하기 등등 스스로 공상에 잠기는 방법이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거다.

결론: 리듬세상은 정말 재밌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