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시장으로의 진출

북미에서 또 실패할 수는 없었다. 세가는 드림캐스트 북미 런칭을 전례없이 화려한 행사로 만들기 위해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했다. 하드웨어의 물량, 품질 그리고 홍보에 있어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버니 스톨러는 누구라도 만족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라인업이 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야말로 세가가 가진 모든 것이 드림캐스트를 위해 투입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림캐스트가 북미에 발매되기 전 해, 세가는 3억 780만 달러라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당시 북미에서 세가는 제네시스의 성공적인 스포츠 게임 라인업을 통해 상당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소니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렉트로닉 아츠를 자신들의 편에 끌어들였다. 스톨러는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A와 협상을 기획했던 것이 바로 그 때 소니에서 일하고 있던 그 자신이었으니까. 당시 EA는 비주얼 컨셉츠라는 개발사에 PS용 메이든 시리즈의 코딩을 맡겼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취소되었고 해당 게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지만, 스톨러는 비주얼 컨셉츠가 보여준 역량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가가 스포츠 게임 영역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비주얼 컨셉츠 역시 취소된 프로젝트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스톨러는 천만 달러라는 금액에 비주얼 컨셉츠를 인수하여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미식축구 게임의 개발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물론 메이든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팬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따라서 스톨러는 EA의 레리 프롭스트(Larry Probst)를 만나 EA와 세가의 새로운 협력 방안을 모색하였다.

EA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 대가로 매우 어려운 조건을 걸었다. 스톨러는 EA의 이러한 태도에 익숙했다. 소니에 있을 때 다른 서드파티에 비해 60 퍼센트도 안되는 라이센스 비용을 요구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톨러는 이 제안을 수용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EA는 드림캐스트에서 스포츠 게임을 독점으로 출시할 권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미 비주얼 컨셉츠를 인수하고 게임까지 개발 중이었던 세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세가는 자사의 게임으로 EA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쪽을 선택했다. EA는 이러한 결정에 대해, 앞으로 드림캐스트로 어떠한 게임도 내지 않을 것이며 자사의 차세대 메이든 게임으로 세가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응수했다.

EA를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결국 드림캐스트가 플레이스테이션 2와의 경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는 의견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가의 반격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스톨러는 지금까지도 자신있게 주장한다. "(비주얼 컨셉츠의) NFL2K를 직접 플레이해 본 게이머라면, 이 게임이 당시의 메이든 게임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많은 팬들과 게임 비평가들이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세가에 우호적인 시장이었다. 마스터 시스템은 북미와 일본에서 수명이 다한 이후 몇 년 동안 꾸준히 살아남았고, 16비트 전쟁에서도 유럽은 세가의 편이었다. 드림캐스트를 준비하면서 세가에서는 처음으로 유럽 주재의 개발 스투디오를 설립하고자 했고, 업계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프레드릭 레이날(Frederick Raynal)이 이끄는 아델린 소프트웨어(Adeline Software)를 인수하게 된다. 세가에 인수된 이들은 유럽 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오리지널 게임들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다지 오랫동안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데뷰작이었던 토이 커맨더(Toy Commander)는 무척 인상적인 게임이었다.

스톨러는 또한 모탈 컴뱃이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첫 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고, 미드웨이와 만나 드램캐스트용 모탈 컴뱃을 동시 발매 타이틀로 내놓을 것을 요청했다. 모탈 컴뱃 시리즈는 3D로 넘어가면서 그 매력이 조금 흐릿해졌지만, 모탈 컴뱃 4에 기반한 독점 타이틀을 갖추는 것은 분명 콘솔 판매량에 도움이 될 요소였다. 미드웨이는 새로운 버전의 NFL 블릿츠와 하이드로 썬더의 이식작 등을 통해 드림캐스트의 런칭을 적극 지원했다.

일본 서드파티들의 참여도 중요했다. 캡콤은 이미 나오미 기판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들의 독특한 3D 격투 게임인 파워 스톤은 북미 런칭에 있어 매우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남코는 설득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소니 하드웨어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둔 그들은 아케이드에 있어서도 플레이스테이션 기반의 보드를 선호했다. 철권은 세가로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큰 존재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32비트 아케이드 격투 게임인 소울 칼리버의 이식이 결정되었다. 소울 시리즈가 당시 그다지 인기 시리즈는 아니라는 점에서 남코는 세가에게 떡밥을 하나 던진 것이었지만, 드림캐스트로 이식된 소울 칼리버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소울 시리즈는 남코의 대표 시리즈인 철권에 못지 않은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물론 북미 동시발매 타이틀 라인업의 중심에 있던 것은 소닉 어드밴처였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소닉의 부활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그 때문에 팬들의 열망은 더욱 뜨거웠다. 32비트 시대를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던 소닉이었던 만큼, 과연 3D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했다. 마리오조차도 기존의 2D 공식을 모두 버린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던 만큼, 소닉이 그 특유의 빠르고 화려한 느낌을 3D 환경에서 다시 살려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닉 팀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드림캐스트의 런칭은 그야말로 성대한 이벤트였다. 세가에서 마케팅에 쏟아부은 금액만 하더라도 1억 달러에 이르렀고, 덕분에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가의 새로운 게임기가 1999년 9월 9일에 발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매 당일 17가지 게임들이 동시 발매되었으며, 하나를 고르기 힘들 정도로 양질의 소프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발매일이 다가오자 세가 팬들에게는 결코 인기가 있다고 할 수 없었던 버니 스톨러는 이선으로 물러나고 마케팅 시니어 바이스 프레지던트였던 피터 무어(Peter Moore)가 세가의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톨러는 세가를 떠나고 무어가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다음 CEO에 취임한다.

무어는 드림캐스트 런칭을 비교적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그의 모든 것은 이 한 순간에 달려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만약 드림캐스트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세가라는 회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9월 9일 피터 무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발매 당일 드림캐스트는 지금까지 비디오게임기들의 발매 당일 판매 기록을 갱신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중 최고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세가에 의하면, 드림캐스트와 관련 게임들, 그리고 악세사리까지 합한 매출은 역사 상 그 어떤 영화나 음악CD 또는 가정용 비디오의 매출보다도 높았던 것이다. 세가의 미래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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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비스 파스 (Travis Fahs) / 번역: 페이비안 / 원문 게시일: 2009.9.7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출처 표기를 조건으로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 세가 팬이시라면 또 다른 IGN 번역연재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세가의 역사'도 읽어보세요. 좀 더 세가라는 회사 쪽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번 글은 드림캐스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좀 더 집중하여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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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FL2K는 잘 모르지만, NBA2K는 정말 인상적인 게임이었습니다. 지금도 집에서 가장 자주 하는 게임은 NBA2K9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