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캐스트의 북미 발매일인 1999년 9월 9일은 미국에 살고 있는 게이머들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닌텐도의 대히트 게임기인 NES는 물론이려니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의 발매일도 이 날 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99/09/09라는 날짜 자체부터 그렇지만, 드림캐스트의 런칭은 발매일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마케팅부터 시작하여 발매 당일 성대한 이벤트까지 이르는 현재의 게임기 런칭 트랜드가 탄생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많은 이들이 이 날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드림캐스트로 문을 연 여섯번째 세대의 비디오 게임기에서는 드디어 3D 기술이 성숙기에 이르렀으며 그 이전까지 게임 디자이너들의 발목을 잡았던 많은 기술적인 제한 요소들이 상당히 해소되는 시점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PS2, 게임큐브, 그리고 엑스박스는 지금 시점에서 보더라도 조금 떨어지는 그래픽 외에 현세대 게임기와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게임기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드림캐스트는 한 때 하드웨어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던 거인, 세가의 마지막 투혼이었다. 닌텐도가 장악했던 시장에 감히 도전하여 한 때 이들에게 결정타를 먹이기도 했던 세가는 32비트 시장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본 후 게엄 업계 사상 초유의 극적인 자기혁신으로 많은 게이머들의 기대를 모았다. 비록 그들의 이러한 노력이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짧고도 강렬했던 드림캐스트 시대 세가의 창의성은 그 이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드림캐스트는 6세대가 지속되던 시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그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하지만 드림캐스트가 남긴 유산은 결코 작지 않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팬들의 마음 속에 애틋하게 남아 있는 게임기가 세가의 작고 하얀 기계 외에 또 있을 수 있을까?


바닥부터 다시

1996년 버니 스톨러(Bernie Stolar)가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CEO를 맡게 될 당시, 회사의 전망은 그리 밝은 상태는 아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세가의 핵심 유저들, 닌텐도의 게임을 아동용 게임이라고 느끼는 비교적 나이가 많고 게임을 오랫동안 즐긴 올드 게이머들이나 메든 시리즈와 몬타나 시리즈의 장단점을 놓고 말싸움을 즐기던 스포츠 게임의 팬들 중 상당수를 빼앗아 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반면 닌텐도의 새로운 게임기는 좀 늦게 등장하기는 했지만, 화려하고 새로운 마리오 게임으로 자신들의 팬층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남겨진 것은 아케이드 게임들의 열혈 팬층이었지만, 이들은 아케이드 시장 자체의 몰락으로 인해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스톨러는 새턴에 대해 이렇게 단정짓는다. "하드웨어적에 있어서 나는 새턴이 완전히 실패한 제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게임 자체는 멋졌지만, 하드웨어 면에 있어서는 정말 볼품없는 기계였죠." 실제로 새턴은 그렇게 환상적인 아케이드 하드웨어로 시장 트랜드를 이끌었던 세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불필요하게 복잡하기만한 기계였다. CD 매체와 3D 환경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게임 개발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여기에 두 개의 CPU와 2 개의 그래픽 프로세서를 가진 시스템을 대상으로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개발사 입장에선 생각만으로도 골치아픈 일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라면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보고자 몸부림을 쳤을지도 모르지만, 스톨러는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세가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지만, 새턴을 통해서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나는 새턴이라는 게임기 자체를 빨리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어요." 이러한 결정은 새턴 팬들에게 무척 가슴아픈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북미에서는 세가 게임들이 거의 일 년 동안 하나도 출시되지 않는 상황을 야기했다.

그러나 팬들은 모르는 사이 뭔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있었다. 스톨러의 결정은 단지 그가 새턴을 싫어해서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약 세가에서 새로운 게임기를 내놓는다면 출발부터 뭔가 달라야 한다고 믿었고, 실패한 게임기에 인력을 투입하는 대신, 세가의 개발진들 모두를 새로운 희망에 올인한 것이다.

스톨러에 따르면 이는 또한 세가 오브 제팬의 CEO 나카야마 하야오의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새로운 하드웨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이 새로운 하드웨어에 제가 깊이 관여하기로 되어 있었죠. 플랫폼의 방향성이나 새로운 팀원의 구성 그리고 세가 전체의 전면적인 개편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스톨러는 소프트웨어가 그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고 공공연히 말해왔지만, 새턴의 교훈을 돌아볼 때 하드웨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2비트 시대에 일본 본사의 오만함으로 인해 세가가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64를 구성하는 핵심 하드웨어가 사실 세가의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제안을 거절한 것은 다름아닌 세가 자신이었다. 그리고는 결국 일반적인 부품을 덕지덕지 연결하여 프로그래밍하기 무척 까다로운 프랑켄슈타인 같은 게임기가 등장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CEO였던 톰 칼린스키(Tom Kalinske)나 미국 R&D 총괄인 조 밀러(Joe Miller)의 조언과 충고를 무시했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세가의 새로운 게임기 개발을 위해 두 개의 팀이 구성되었다. IBM의 야먀모토 타츠오가 카타나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미국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여기에는 PC 게임 시장을 혁신한 미국제 3Dfx 부두 칩셋이 탑재되었다. 일본에서는 메가 드라이브의 디자이너였던 사토 히데키가 듀랄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성하여 히타치와 NEC 등 일본 회사에서 공급된 부품을 사용하였다. NEC의 파워VR은 3Dfx만큼 큰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두 시스템은 서로 막상막하의 성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