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 하라 료

나름의 문화생활 2009. 8. 26. 14:30 Posted by 페이비안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두번째 작품. 첫번째였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읽은 지 그리 오래 지난 거 같지 않은데도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지만 (글을 쓰다보니 기본적인 줄거리는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 문체 만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드라이하지만 너무 과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을 갖춘 건조함이랄까.  

'내가 죽인 소녀' 역시 그런 연장선 상에서 마음에 드는 느낌. 어딘가로 이동할 때 루트를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던지, 닳고 닳아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주변 상황을 가능한 한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는 주인공을 보면 소위 말하는 '남자의 세계'를 그리는 소설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고 작가가) 지나치게 중년의 멋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인간적인 감정들이 살짝,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좋았다. 남자이고자 해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남자일 수 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

대학교 입학할 때 즈음해서 국내에 불어닥친 하루키 열풍에 편승, 그 이후로 일본 소설에는 나름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1. 감정의 과잉이나 설정의 과잉으로 피곤하게 하는 부류, 2. 재기발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한없이 가벼울 뿐인지 헷갈려서 읽고 나면 허무한 부류..를 너무 자주 접하게 되어 한동안 스톱. 그리고 다시 잡은 쪽이 추리 소설 쪽이다. 이야기 만으로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용의자 X의 헌신'이 제일 괜찮았지만, 읽는 맛 자체는 하라 료의 두 작품들이 제일 좋았다.

한 2~3일 만에 단숨에 읽었다. 아침에 운동 갔다가 사무실에 일찍 도착하면 생기는 여유 덕분이기도 하지만, 몰입도가 꽤 높은 편. 그래도 하루 만에 다 읽어내려야 할 정도로 끌어당기진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좋았다. 쓸데 없이 두꺼운 표지에 판본은 미묘하게 작고 글씨와 행간은 의미 없이 넓은, 출판사의 돈 욕심이 뚝뚝 묻어나는 스타일이 아니라 적당한 크기에 표지도 얇아 두께에 비해 가볍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드는 점. 제발 다른 책들도 이렇게 만들어 주면 안될까?

이 책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게임이라면 아마도 단연코 탐정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겠지. 사실 예전 게임잡지에서 정모 기자님이 열심히 밀었던 게임이라 캐릭터나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2차적으로 전해 들은 게 대부분이고, 실제로 플레이한 것은 KTF 휴대폰용으로 나온 게임 달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은 없지만. 휴대폰 게임인데도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드보일드!'라고 외치고 싶은 듯한 분위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시리즈의 다른 게임들도 그런 방향이 아닐까 싶으니.

내가 죽인 소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하라 료 (비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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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추리 소설의 범죄는 이렇게 퍼즐 맞추듯 맞아 떨어지는데, 현실의 범죄는 해괴하기 이를 데 없다. 꿈에서 유골함을 꺼내달라고 했다니... 현실은 추리소설보다 공포소설에 더 가까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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