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게임 비평 블로그인 Critical Distance에 매주 올라오는, 주간 비평글 모음 This Week in Videogame Blogging 시리즈를 실시간으로 번역 연재하는 서양 비디오게임 블로그 소식, 그 네번째 시간입니다. 이 번역 연재는 개인적인 취미이자 스터디 겸, 국내 게임 업계 관련 분들에게 읽을 거리 및 생각할 거리를 공유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글들에 관심을 가지실 만한 분들께 널리 추천 부탁드립니다.

사이트 관리자에게 정식으로 번역 허가를 받았고요. 제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오역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 오류나 관심 가는 링크에 대한 코맨트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오류는 잽싸게 수정하고 관심글에 대해서는 요약 혹은 전문 번역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으시는 분들 각각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을 발견하시길 기원하면서, 이하 전문 번역 나갑니다. 이번 주에는 원문 저자가 약간 SF적 분위기를 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

원문: This Week in Videogame Blogging: January 29th / 출처: Critical Distance

지금이 언제죠..? 연도가 어떻게 되나요? 이런, 남은 시간이 별로 없군요! 이번 주 비디오게임 블로그 소식을 전해드릴께요. 너무 늦기 전에!

시작에 어울리는 가벼운 글로, 짐 로시그놀(Jim Rossignol)의 풍자적인 셀프 인터뷰부터 볼까요.



RPS의 짐 로시그놀: 이 위험한 물건을 얼마에 팔 예정인지?

짐 로시그놀: 단돈 오천원. 원래는 1억 정도 받고 팔아야 할 물건이지만,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공포로부터 주의를 전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한, 그런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이 정도만 받기로 했다. 무슨 얘기냐면,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을 거잖아. 어떤 경우에는 꽤나 참혹한 최후가 될 수도 있다구. 이렇게 예정된 최후가 주는 무한의 심연 대신에, 알록달록한 색깔과 듣기 좋은 소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꽤 가치가 높은 거 아니겠어?


달아오른 지구가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읽을 거리로서, 좀 더 무게감 있는 인터뷰도 한 번 볼까요. 하드코어 게이밍 101에서는 존 스제페니악(John Szczepaniak)이 메탈 기어 솔리드 2: 선즈 오브 리버티굴려라 괴혼 시리즈의 번역가, 아그네스 카쿠(Agness Kaku)와의 인터뷰를 올렸네요. 꽤 장문의 글인데, 맛보기를 보여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마치 설탕물에 빠진 개미와도 같은 상태라고 할까. 예전 초창기 시절 게임이라는 미디어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때문에 사용되던 언어도 그것이 그래픽이든, 게임 콘트롤이든, 실제 텍스트든 미디어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의 성장이 언어를 빠르게 앞서 가게 되었고, 그 와중에 허접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하거나 만화책 어딘가에서 뜯어온 듯한 대사가 게임의 언어를 계속해서 채워가게 되어 버렸다. 언제 업계가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될까. 누군가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좀 예의 바르게 표현하자면 그저 서로 칭찬을 주고 받기에 급급한 모임처럼 보인다. 이러한 식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여전히 뜨끈한 지하 세계에 살게 될 우리의 돌연변이 후예들에게 축구는 그닥 의미가 없는 고대 유물이 될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이번 주에는 두 편의 글이 스포츠와 게임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먼저 스캇 저스터(Scott Juster)는 비디오게임이 보드 게임보다는 스포츠에 훨씬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요, 다음으로 박학다식한 톰 비젤(tom Bissell)은 만약 게임에 예술이 있다면, 스포츠 게임에도 예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네요.



예술이 무엇이든 간에 아름다운 것임에는 분명하다. 어떤 의미가 되었든 말이다. 제한된 규정과 법칙 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아름다움의 표현은 예술이 아닌 반면에, 약간 덜 제한된 규정과 법칙 (이를테면 시의 운율)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아름다움의 표현은 예술이라고? 뭔가 아귀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스포츠의 최고 영역이 어떤 식으로든 예술로 인정되지 않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다른 어떤 예술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에릭 슈왈츠(Eric Schwarz)는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몰입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세빗으로 빗질하듯 꼼꼼한 개념 정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영속하는 환영을 통해 인류 노예화를 꾀하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들은 잘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입니다.

삶이 단순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지난 주를 잠깐 돌이켜 볼까요? 라프 코스터(Raph Koster)가 네러티브는 게임 매커니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바가 있었죠. 이번 주에는 이어지는 내용으로 "네러티브는 대체로 컨텐츠 또한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주장에 맞다면 코스터가 "피드백"이라고 명명한 기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몇몇 게임들이 애매한 위치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마피아, 혹은 조엘 굿윈(Joel Goodwin)에 따르면 "이벤트신의 대부" 같은 게임들 말이죠.

만약 그들이 폭파되어 망가진 폐허 속에서 우리 서버를 발굴한다면, 그 서버에서 첫번째로 복구되는 글이 드류 밀라드(Drew Millard)의 50 센트, 사람, 아이콘 그리고 게임 아바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가 끝나면, 그는 오백만불 짜리 맨션으로 돌아가 온갖 세상의 좋은 것들이 가득한 침실에서 잠이 들 것이다. 만약 인생이 비디오게임이라면, 50 센트는 이미 그 끝판을 깼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 게임을 계속하는 것일까?


외계의 고생물학자들은 아마도 에릭 스웨인(Eric Swain)의 드라이버: 샌 프란시스코에 대한 집착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종말 이후의 처음 몇 년간을 버티며 생존에 성공하는 우리들 중 몇몇은 이 게임의 과장된 장르 논리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그들은 과연 커크 배틀(Kirk Battle)의 배스쳔뉴 베가스의 황무지에 대한 글에서 나타나는 괴이한 예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취하는 행동이 실제로는 스토리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루도네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는 개념을 만든 바 있다. 필연적으로, 게임 속 메커니즘은 그 스스로를 강요하게 되고, 게임의 스토리는 레벨을 올리거나 보다 파워풀한 아이템을 얻는 행위에 비해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떨어지게 된다. 폴아웃: 뉴 베가스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어 해결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중략] 배스쳔은 작은 게임이어서 가능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플레이어와 완전히 독립된 나레이터를 내세워 이러한 불일치를 직접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누가 알겠어요? 다시 재건되는 문명 속에서는 오카미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죠. 이를테면 제프리 메투레프(Jeffrey Matulef)의 회고록이나 조한 코스키(Johannes Koski)의 현지화에 대한 연구에서처럼 말이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문화를 평가할 때 비치는 게임 블로거들 특유의 뉘앙스는 미래 세대 혹은 노예들도 감지할 수 있을 거에요. 닉 디니콜라(Nick Dinicola)의 아캄 시티 비평에서 배트맨이 무척이나 평면적인 캐릭터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나, 캐서린에서의 성 그리고 관계에 대한 표현은 단지 다른 게임들에 비해서만 성숙해 보이는 것이라는 빌 코벌리(Bill Coberly) 주장 같은 것들을 본다면요.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가진 잠재력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망가진 공식들을 똑같이 재탕하고 똑같은 진창에 뒹굴고 있는 게임들을 계속해서 플레이하고 있는 현실은 것은 얼마나 화가 치미는 일인지. 그래서 좀 더 성숙한 주제에 대해, 털끝만큼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붙잡아 보려고 하는 소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종류의 행동에 대해 떳떳한 입장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멸로 인한 폐허 속에서 무엇인가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일 것입니다. 반 고흐, 뱅스키, 그리고 트레이시 리엔(Tracey Lien). 게임 저널리즘도 인상파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진심으로, 환상수호전 II를 보존하는 건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요. 코나미와 소니가 이 게임을 PSN에 올리기 전에 세상의 종말이 닥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작품은 우리 맘속에 살아 있을 거에요. 제이슨 슈레이어(Jason Schreier)가 그의 마음 속에 이 작품을 새긴 것 처럼 말이에요.

그래요, 비록 고래들의 반란으로 인해 우리 인류의 존재가 황혼에 접어들기 일보직전에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작가들은 이번 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게임이라는 미디어의 근원과 궤적을 살려보고 있지요. 로완 카이저(Rowan Kaiser)는 오픈 월드 시스템의 근원으로서 울티마에 대한 헌정사를 썼고요, 리사 포일레스(Lisa Foiles)는 게임계의 "문학적 명작들" 중 하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운데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시선을 더 먼 곳으로 던지고 있네요. 세바스챤 위퍼(Sebastian Wuepper)는 게이머들이 "외부의 관점"을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네요. 하지만 그의 주장이 아직 늦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존 밴더호프(John Vanderhoef)가 설명하듯 우리도 역시 TV드라마 팬들과 같은 식으로 기억될 운명일까요?



우리가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사이의 구분, 이를테면 매드 맨과 제네럴 호스피털 사이, 시민 케인과 콜 오브 듀티 사이의 구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계급을 넘어서 작동한다. 기호의 차이들은 다른 무엇보다 성별, 인종, 연령의 범주를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로완 카이저(Rowan Kaiser)에 따르면, 미래는 우리의 문화와 커뮤니티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하네요. 관심 있는 것은 우리의 게임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더 많은 게임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게임 비즈니스는 중요하다. 비디오 게임들에 대한 더욱 솔직한 담론을 장려하고 더 좋은 게임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리뷰 점수는 중요하다. 팬 사이트의 소수자에 대한 수용과 관련된 이슈는 업계 전반의 소수자에 대한 수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를 마음에 새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같은 것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가끔은 한 걸음 물러서서 이걸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 게임은 게임에 관한 것이며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계획된 의도를 바탕으로 논쟁을 쫓아다니는 것은 논쟁에 뛰어들기 위한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또한 매우 피곤하고 답답한 행위이기도 하다. 논쟁거리가 충분치 않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나 여러 비평가들에게는, 개인이 게임에 엮기는 데 있어 그가 속한 사회가 수행하는 역할이 단순히 무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IGN의 케자 맥도널드(Keza MacDonald)에 따르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뭐? 비디오게임에서의 성(性)이 이성애자에 비해 동성애자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건데? 그러나 이러한 가시성이 실제로 중요하다. 현실적이고 감정 이입이 가능한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조이스틱의 폭스 반 앨런(Fox Van Allen)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러한 [WoW에서의 내재적, 명시적인 동성애 혐오와 트랜스젠더 혐오] 사건은 블리자드에게 있어 매우 강력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게이 커뮤니티로부터도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벌고 있는 회사이기도 하니까." (두번째 링크에는 각종 공포증이 난무한다는 점에 주의하시길)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제발, 제가 떠나기 전, 좋아하는 게임을 벡델 테스트에 돌려보세요. 후손들이, 만약 존재한다면, 당신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제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은 글이 있습니다. 젠 프랭크(Jenn Frank)의 "죽음, 모성애 그리고 크리쳐스"라는 글입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는 양어머니를 만나러 갔던 날, 나는 오래된 컴퓨터 앞에 앉아 옛날 플로피 디스크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디스크에 담아두었던, 십대 시절에 썼던 글들을 찾기 위해서.

그러다가 이름과 날짜가 라벨로 붙어 있는 디스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름, 날짜.. 이름, 날짜...

이게 뭘까 생각하다가, 이게 다 (크리처스의 인공 생명체인) 노른(Norn)들이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이들에게 무엇을 했던 것일까. 당시에 내가 이들을 얼마나 살리고 싶어했는지를 기억해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세이브 파일들이 아니라, 비문이고, 묘석이었다. 삶을 잠시 멈추어 놓은 것이 아니라, 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두려움에 마비되어, 노른들 역시 하나씩 하나씩 박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너무도 짧았던 삶에서 구원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짓을 하고 말았다. 나는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기가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그들을 아예 죽여버렸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 이제 미래는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닥쳐온 재앙을 멈출 수 있다면,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 꼭 살아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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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onion 2012.02.01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번역글 잘봤습니다.
    자가비판이라는건 분야를 막론하고 생각할게 많아지게 되네요 ㅎㅎㅎ

    그나저나 벌써 2011년이네요 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