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게임 비평 블로그인 Critical Distance에 매주 올라오는, 게임 비평글 모음 This Week in Videogame Blogging 시리즈를 (거의...) 실시간으로 번역 연재하는 서양 비디오게임 블로그 소식, 그 두번째 시간입니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게임 탓하기'의 바닥에서 느껴지는, 게임은 그저 뇌 비우고 하는 단순 유희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대한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의 반론입니다.

사이트 관리자에게 정식으로 번역 허가를 받았고요. 제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이해에 실패한 내용에 대해서는 발번역 이하의 퀄리티가 나올 수도 있음을 감안해 주세요. 번역 오류나 관심 가는 링크에 대한 코맨트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오류는 잽싸게 수정하고 관심글에 대해서는 요약 혹은 전문 번역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으시는 분들 각각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을 발견하시길 기원하면서, 이하 전문 번역 나갑니다.

원문: This Week in Videogame Blogging: January 15th / 출처: Critical Distance

낡은 한 해가 또 가고, 새로운 날들이 밝았습니다. 2012년에도 게임 비평이라는 수레는 얼심히 돌아갑니다. 금주의 비디오게임 블로그 소식을 전해드리는 시간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먼저 짧은 공지사항 하나. 디지털 러브 차일드에서 원고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가 보시길.

이번 주에는 톰 챗필드(Tom Chatfield)가 마인크래프트의 엔딩을 쓴 줄리안 고흐(Julian Gough)와 만나 "끝이 없는 게임의 끝"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꿈"이라는 단어를 썼죠, 하지만 사실 게임이라는 꿈, 삶이라는 꿈에 대한 이야기에요. 상징으로서의 꿈이죠. 사람들이 게임 속에 너무 빠져들어 게임 자체가 세계가 되는 그 순간이 주는 낯설음을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빠져드는 순간이 정말 있거든요. 특히 마인크래프트 같은 경우에는 그 느낌이 너무나 영속적이기 때문에, 게임이 끝나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는 게 깜짝 놀라는 경험이 되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그러한 순간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어요. 플레이어가 두 개의 세상 사이에 있는, 그래서 어느 쪽이 더 현실에 가까운지 모호하게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말이죠.

이번 주 또한 원글에 이어지는 의견을 담은 글들이 많이 올라왔네요. 데니스 파(Denis Farr)가 자신이  썼던 "한 게이머(gaymer)의 이야기"와 그 글에 대한 반응들을 반추한 글이 첫번째 입니다. 그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은 결론과 함께 마무리했습니다. "소년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년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적인 영역에서 개자식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얼마 전, 에스펜 아르세스의 온라인 게임 연구 저널에 절차주의(proceduralism)에 대한 반론을 담은 미구엘 시카트(Miguel Sicart)의 도발적인 논문이 게재되었습니다. 이 논문과 관련하여, 깊이 있는 반응들이 상당수 올라 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두 포스트를 소개해 드립니다.

먼저 찰스 프랫(Charles Pratt)은 "플레이어는 포함되지 않음"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게임 속 법칙들과 플레이 사이의 풀리지 않는 복잡한 관계가 가지는 특성은, 게임의 의미가 그 법칙성 속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법칙들과 시카트가 말하는 '도구적' 플레이가 게임 속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것 또한 입증시켜 주고 있다. 결국, 보고스트가 플레이어와 플레이를 빼놓고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실제로 그는 '소프트웨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법칙들과 목적들을 빼놓고 게임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사실 '즐거운 행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논점들이 만들어질 수 있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리는 실제로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크 넬슨(Mark Nelson)은 프랫이 올린 글에 댓글로 논의를 이어가는 것부터 시작하여 시카트의 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때때로 시카트의 논의는 "절차주의"가 게임 법칙들이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교훈적이고 설교적인 메시지를 담기 위해 플레이어를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그의 우려는 앞선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경우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플레이어들에게 실제로 그 어떠한 진정한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 게임들이 존재한다는 그런 경우로부터 말이다.

학문적인 논의는 여기까지 해두고, 화제를 돌려 좀 더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죠. 찰리 홀(Charlie Hall)은 밀리터리 슈팅 게임에 대한 그의 팬심 덕분에 퇴역 군인으로 오해받게 된 사연을 약간의 자기 반성과 함께 들려줍니다. 같은 장르를 소재로 했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케일 맥킨논(Kyle McKinnon)은 자기 반 학생들의 행동 패턴과 폭력적/비폭력적 게임에 대한 취향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글을 올렸네요.

우리 사이트에서 2011년 최고의 게임 블로거 중 하나로 꼽혔던 케이트 콕스(Kate Cox)는 드래곤 에이지 II를 영웅의 여정으로 읽는 것이 왜 잘못된 독해인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RPG 쪽 이야기를 꺼낸 김에, 로완 카이저(Rowan Kaiser)가 RPG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컬럼을 시작하여 시끌시끌하다는 소식도 전해드립니다. 첫 글로 오늘날에 이르는 서양 RPG의 현황이 올라왔습니다. 조쉬 바이서(Josh Bycer)는 규범을 깨뜨린 RPG 게임들이라는 다섯 파트의 시리즈(1,2,3,4,5)를 올렸네요.

시리즈물을 좋아하신다면, 샤무스 영(Shamus Young)이 쓴 다섯 파트의 시리즈도 있습니다. 스카이림의 도둑 길드의 플롯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수 년"에 걸쳐 금고를 털었다면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람들이 보물을 금고 안에다가 다시 채워두기라도 하는걸까? 약탈품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누가 신경이라도 쓰는 것일까? 그리고 이게 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왜 길드원들은 그들의 보물을 공동의 금고따위에 쌓아두는 걸까? 혹시 뭔가 히피에다가 공산주의 컨셉이 섞여 모두가 가진 걸 나누는 도둑 길드라도 되는 걸까?

첫번째 글에 대한 링크는 여기입니다. 이어지는 글들에 대한 링크는 각 포스트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스카이림 관련 마지막 소식으로는 라디안트 스토리가 왜 게임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인지를 다루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얼마 전에 보내드린 2011년 정리글을 보셨던 분들이라면 에릭 스와인(Eric Swain)이 작성한 드라이버: 샌 프란시스코 관련 글을 관심 있게 읽으셨을 텐데요. 이번 주에는 게임에 대한 그의 애정을 좀 더 파고들어 두 개의 글을 더 작성했네요. "모든 게 그 표현에 담겨 있다""드라이버: 샌 프란시스코의 게임 매커니즘으로서 마법적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입니다.

마법적 리얼리즘으로부터 성별 수행성(gendar performance)의 구체적 현실로 내려와서, 레이 알렉산더(Leigh Alexander)가 가마수트라에 올린 "댄스 샌트럴에서의 성별과 자기 표현"이라는 글도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타미 바리뷰(Tami Baribeau)는 최근에 보더 하우스에 올린 글에서 캐릭터 생성에서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의 관점에 이르기까지, 게임 속 비만 비하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해리스 오말리(Harris O'Malley)는 작년 12월 경 코타쿠에 너드(nerds)와 남성 특권이라는 글을 올려 독자들 사이에 상당히 열띤 논란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는데요, 이번에 논의의 분해라는 제목으로 지난 논의에 이어지는 글을 띄웠습니다. 해당 글에서 오말리는 페미니스트 비평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는 "논의의 세 가지 D"로 편향(Deflect), 논점 이탈(Derail) 그리고 기각(Dismiss)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점 이탈이 이러한 주장들의 가장 일반적인 버전으로, 당사자가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별안간, 긱 컬쳐(geek culture) 내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대신, 억압의 체계에 대해 논의하거나, 또는 왜 우리가 굳이 이 주제에 대해, (이를테면 좀 더 심각한 문제인) 여성 할례에 대해 논의하는 대신 이런 걸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 글에 동의하는 사람은 비디오 게임에서 "섹시"한 캐릭터들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억지 주장이나 상대해 주어야 하는 흐름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D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마시니매이터(machinimator) WoWCrendor와 성차별을 반대하는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발단은 트위터에 올라간 문제성 언급이었습니다. 애플 사이더 메이지가 왜 그의 언급들에 문제가 있는지를 정리했습니다. 

비록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연결되는 내용으로 케이티 윌리엄즈(Katie Williams)는 WoW 플레이어들이 게임문화 안에서도 "성 안의 도시"라고 규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MMO 게임들을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서브컬처 속의 서브컬처로 바라보는 윌리엄즈의 관점이 WoW 커뮤니티에 대해 생각하는 데 있어 유용한 프레임이 될 수 있겠습니다. 비록 그녀의 결론들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말이죠. 

마찬가지로, "성 안의 도시"도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WoW에서 "맹인견"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와의 흥미로운 인터뷰를 보면 말이죠. 이 플레이어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드 동료에게 도움을 주면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4챈의 멤버들에 의해 개발된 연애 게임, 장애 소녀가 큰 화제거리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글 중 하나가 잭 맥나미(Jack McNamee)가 쓴, 이 게임이 어떻게 그 소재를 대상화하면서도 동시에 인간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한 글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주 페이스트에는 브라이언 테일러(Brian Taylor)의 스타 워즈 갤럭시즈의 폐쇄에 대한 "여행객"의 감상이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진법부터 시작된 디지털에는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디지털은 영원하며, 그와 동시에 보존하기 무척이나 어렵다. 디지털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존재하기를 멈추기 전까지만 그러하다. 디지털은 결코 침식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은 항상 접근이 가능하다. 오류가 생기기 전까지는. 디지털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한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내가 있는 이 곳, 타투이니(Tatooine)는 사막 행성이다. 하지만 앞으로 수 시간 뒤, 이 선인장도 없는 대지는 서서히 죽어가는 땅이 되는 대신, 완벽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수많은 0과 1로 지어진 디지털은 폐허를 남기지 않는다. 아마도 그 때문에 디지털은 우리 마음 속에 편리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는 거추장스러운 물리적인 형태의 방해를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어떤 비디오 게임들은 그렇게 시끄럽게 게임의 배경스토리를 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그래, 사실 여기에도 과거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죽어가는 MMO를 위한 장송곡의 흐름을 이어 이번에는 무서운 이야기 쪽으로 넘어가자면, 게임 디자인에 있어 호러 장르의 장점과 관련된 두 개의 포스트가 올라왔습니다.

먼저 스티브 게이너(Steve Gaynor)는 이토 준지의 호러 만화에 비유하여 현실의 근본적인 규칙들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게임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각화의 힘, 이는 많은 예술가들이 가진 생각의 방법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대신, "이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것. 이는 또한 우리가 아이였을 때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을 때, 우리 주변에 대해 고정관념을 아직 갖지 않고 있었을 때,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상상력이 꽃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옷장이나 침대 밑에 괴물이 혹시 괴물이 있는 건 아닐까? 없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있을거야! 외계인이 하늘에서 내려오진 않을까? 개와 고양이가 혹시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유령과 천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저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거울 뒤, 혹은 토끼굴 저편에는 다른 세상에 있지는 않을까? 그러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전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고,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글은 브린들 브라더스의 존 브린들이 쓴 글로, 아마도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미 보셨을 오싹한 왓슨 비디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암네시아의 카메라 시점 활용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인칭 게임들은 경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다실 말해, 게임 속 문제들은 이를 살펴봄으로서 해결된다. 암네시아에서는 반대로,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스스로의 공포로 인해 주인공 캐릭터 다니엘의 현실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복하게 만든다. 스물스물 다가오는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위험한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스크린 밖의 음성적 공간(negative space)이 보호장치로서 작동하게 되고, 스크린 안을 힐끔 바라보는 것이 책임을 수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나우게이머에서 무급 블로그 포지션이 걸린 컨테스트를 발표한 것과 관련된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락, 페이퍼, 샷건으로 잘 알려진 존 워커(John Walker)가 무급 저널리즘과 노동력 착취 우려에 대해 이어지는 세 개의 글을 올렸습니다. "젊은 게임 저널리스트를 위한 12가지 팁", "급여 없이 일하는 것에 대한 정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당 컨테스트를 직접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로렌 웨인라이트(Lauren Wainwright)는 워커의 포스트들 및 나우게이머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무급 기고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한 글을 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패트릭 클레펙(Patrick Klepek)과 바이오웨어의 맨비어 헤어(Manveer Heir)가 주고 받은 편지의 형식으로 정리된 게임 리뷰와 게임 비평의 차이에 대한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도 다양한 비디오게임 블로그 글, 비평 그리고 코맨트들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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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오류나 관심 가는 링크에 대한 코맨트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오류는 잽싸게 수정하고 관심글에 대해서는 요약 혹은 전문 번역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그럼 즐거운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