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M vs. 게이머, 그 전쟁의 끝은? -2-

게임라이프/번역 2010. 4. 28. 13:09 Posted by 페이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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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콜렉터 아이템을 이용하는 방식들은 다른 게임들이 사용하던 메뉴얼 참조 방식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게임 내 컨텐츠와 연계되는 장점이 있었지만, 여전히 불법복제를 단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쉽게 뚫릴 수 밖에 없는데다 정품 유저들에게도 번잡스러운 작업을 요구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소프트웨어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정품 유저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동시에 크래커들을 차단하는 획기적인 방안이 고민되던 1992년에, 예전에 스펙트럼에서 스피드로더 방식을 개발했던 오션(Ocean)이라는 회사가 매우 독특한 솔루션을 고안해냈다.

로보캅 3와 그 악명 높았던 동글


아미가와 아타리 ST 용으로 출시된 로보캅 3는 초기 3D 폴리곤 디자인이 채용된, 게임 자체로도 매우 독특한 작품이었다. 거기에 더 특이한 것은 패키지 내에 플라스틱 동글이 하나 포함되었다는 점인데, 컴퓨터의 조이스틱 포트에 이 동글이 연결되지 않으면 게임을 로딩할 수 없게 만드는 복제방지 장치였다.

이는 이론상으로는 매우 훌륭한 방식이었고 때문에 오션 사는 발매 전부터 이 새로운 복제방지 장치에 대한 마케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크래커들은 이 도전에 의욕적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게임의 공식 발매일 이전에 동글 없이 로딩 가능한 버전이 등장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게임이 발매된 직후 코모도어에서는 아미가 600을 출시했는데 이전 버전인 아미가 500과는 달리 조이스틱 포트가 플로피 드라이브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로보캅 동글을 제대로 끼울 수 조차 없게 되었다.

2005년 오션 익스피어리언스 메시지 보드에 남겨진 오션의 사장 게리 브레이시(Gary Bracey)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도입한 동글 방식의 복제 방지 장치는 전문적인 크래커들을 막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초기 판매량에 악영향을 미치는 아마추어 크래커들의 불법복제를 조금이나마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게임 타이틀의 판매량 대부분은 첫 주의 판매량으로 결정된다. 아미가를 소유한 모든 이들이 프로그래밍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불법복제를 먹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척 중요한 발매 첫 주에 불법복제가 만연하는 것을 막음으로서 정품의 판매량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 방식은 프로그래밍이 수반되지 않는 평범한 디스크 카피를 통한 불법복제는 확실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크래커들에게 있어 이 방식을 해체하는 것은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로보캅 동글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있진 않다. 오히려 대표적인 불법복제 방지의 실패 사례라는 명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브레이시는 계속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했다. 오션에서 근무한 나의 이력 중에서 로보캅 3와 여기에 포함된 동글은 꽤나 마이너한 이슈였는데, 나는 왜 사람들이 이에 대해 계속해서 중요성을 부여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실제로는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라는 언급도 이어갔다.

당시에는 본격적인 해커나 크래커라고 해도 집에다 디스크 버너를 마련해 놓고 약간의 프로그래밍 기술을 이용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반 유저들도 당시 널리 퍼진 공개 프로그램인 XCopy를 통해 대부분의 아미가용 게임들을 쉽게 복사할 수 있었고, 이런 프로그램은 심지어 롭 노던(Rob Northen)의 카피락(Copylock) 같은 플로피 디스크의 특성을 이용한 불법복제 방지 수단까지 뚫어낼 수 있었다. 당시가 프로그래밍 기술과 예술, 음악 능력을 뽐내는 데모들이 유행하던, 데모신(demoscene)이라는 컴퓨터 서브 컬처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해킹된 게임에 자신의 기술과 예술성을 과시하는 스크롤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크래커들은 어디나 넘쳐나고 있었다.

디스크나 테이프 등 저렴한 저장매체 덕분에 PC 게임의 크래킹은 이론적으로는 크래커들의 방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콘솔 게임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복제 카트리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본적인 제조 설비는 물론 비어 있는 마이크로칩과 그 밖의 구성품들을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드림캐스트의 GD-Rom은 CD의 두 배 저장 공간을 자랑했지만, 불법복제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는 패미콤 시절부터 복제 카트리지가 성행하여 매장에서도 이를 판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스피카(Spica) 같은 회사들은 심지어 패미콤 하드웨어 자체에 대한 복제품도 만들어냈다. 1991년 닌텐도는 대만에서 계속해서 들어오는 불법 카트리지를 차단하기 위한 노력에 미국의 협조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불법복제 카트리지 속에 포함되는 많은 부품들이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코퍼레이션(United Microelectonics Corporation)에서 생산된 것인데, 이 회사의 설립과 운영에 대만 정부까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법복제가 완연한 가운데에서도 닌텐도는 고집스럽게 닌텐도 64에서도 비싸고 불편한 카트리지 포맷을 고수하였다. 대신 소니와 세가가 디스크 기반의 콘솔을 들고 나오면서 CD라는 매체가 가진 손쉬운 불법복제라는 이슈에 직면하게 된다. 초기 컴퓨터들은 불법복제 방지를 위해 소프트웨어 솔루션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통일된 설계를 가진 게임 콘솔들은 하드웨어를 통한 복제 방지 방안을 고려할 수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예로 들자면, 정품 CD의 경우 일반적인 CD-R 버너가 접근할 수 없는 디스크 섹터에 정품 인증 데이터를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식 역시 A/S를 포기하고 모드칩을 설치하던가, PS의 디스크 뚜껑을 조작해 정품 디스크로 부팅하고 복제 디스크로 바꿔 넣는 방식을 통해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불법복제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바로 세가의 드림캐스트였다. 지난 기종인 새턴의 실패로 인해 위기에 처한 것도 모자라 발매 즈음에 PS2가 정식 발표되어 시작부터 어려움에 처한 드림캐스트에 적용된 고유의 저장매체 GD-ROM은 복제 방지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팅디스크만 구할 수 있다면 빈 CD에 어떤 게임이든 복사해놓고 부팅 디스크와 적당한 시점에 교체하는 것으로 간단히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세가 스스로의 기술도 불법복제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1년 발매된 드림캐스트용 브로드밴드 어뎁터는 게이머로 하여금 PC와 콘솔을 연결해놓고 PC에 GD-ROM에 담긴 게임 데이터를 손쉽게 복제하여 CD로 구울 수 있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용이 일반화됨에 따라, 온라인 공간이 불법복제와의 전쟁에 있어 또 하나의 전장으로 대두되었다. 디스크 인증을 위한 제품 키 코드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예전에는 키 인증을 위한 알고리즘과 코드가 프로그램 내부에 있어 크래커들이 쉽게 빼낼 수 있었다. 인터넷 접속을 통한 디지털 인증이 가능해지자 블리자드 같은 회사들이 빠르게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디아블로 2나 스타크래프트 모두 온라인 인증을 요구하였는데, 온라인 플레이 자체가 PC 게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불법복제의 댓가로 온라인 플레이를 포기하는 것이 점점 덜 매력적인 선택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크래커들은 온라인 시스템 자체에 침투하여 제품 키를 빼내는 경우도 있었고, 이 때문에 정품 사용자들 역시 자신의 제품 키가 도난당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PC 버전의 스플린터 셀: 판도라 투머로우의 경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쪽으로 발매된 모든 제품들에 제품 키가 누락되어 그 많은 디스크들이 쓸모 없게 되어버린 사태도 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낙서가 조크 제로(Zork Zero)를 클리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생각없이 휴지통에 버린 게이머들은 대략 난감. -_-


그렇게 불법복제와의 전쟁은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언제나 온라인에 접속되어 있어 게임을 손쉽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정품이든 아니든 말이다.) 제작사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DLC 등의 당근과 인터넷 수시 인증과 같은 채찍을 통해 정품 사용을 촉구하는 것이 오늘날 DRM 전장의 풍경이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제작사와 크래커들 사이의 관계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게임들에는 계속해서 불법복제를 차단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적용되고 있고, 크래커들은 이들을 하나 하나 해체해 왔다. 그 중간에서 제 값을 지불하고 게임을 구매한 정품 사용자들만 스스로가 크래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귀찮은 것들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유비소프트의 현 DRM 시스템의 운명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이 지루한 싸움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낙천적으로 생각해보자. 적어도 지금의 우리는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플라스틱 렌즈를 들여다보진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렇게 적어놓고 보니, 혹시 그 렌즈가 부활하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글: Dan Whitehead / 번역: 페이비안 / 원문게시일: 2010.4.14 / 원문출처: Eurog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