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는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초대형 히트 상품이 되었지만,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나왔을 시점만 하더라도 많은 팬들은 블리자드가 빨리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이어가길 바랬다. 블리자드의 경영진은 스타크래프트가 선전하고 있는 RTS 장르에 자사의 제품을 내놓아 서로 의미 없는 경쟁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차기 작품은 다른 장르로 가져가기로 결정한다.

블리자드가 워크래프트를 개발할 당시, 스토리는 가장 마지막에 첨가된 요소쯤에 불과했다. 빌 로퍼가 오프닝 인트로의 목소리 녹음을 위해 레코딩 스투디오에 도착하였을 때, 그에게는 대본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은 풍부한 신화와 전설, 그리고 상상력이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지만, 그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멘트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두 편의 RTS 게임 이후, 블리자드는 인터랙티브 픽션이라는 장르의 힘을 빌어 워크래프트의 세계를 좀 더 구체화하고자 했다. 블리자드가 설립될 당시에는 어드밴처 장르가 루카스아츠나 시에라 같은 명가와 함께 그 전성기를 맞이한 시점이었고, 블리자드의 개발진들은 오랫동안 어드밴처 장르로의 진입을 꿈꾸고 있었다. 함께할 파트너로 애니매이션 매직이라는 스투디오와 접촉하면서, 그들의 오랜 꿈은 현실로 한 발짝 다가서게 되었다.

메사추세츠에 위치한 애니매이션 매직은 CD-i 버전의 젤다 게임들로 악명을 떨친 회사였지만, 그 이후로 발전을 거듭하여 상당히 높은 퀄리티의 수작업 애니매이션 제작 능력을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스토리와 기획력을 갖춘 블리자드와 손재주를 갖춘 애니매이션 매직의 협업을 통해 40,000 프레임의 수작업 애니매이션으로 구성된 장대한 스토리의 어드밴처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블리자드가 디자인과 각본, 배경, 그리고 음성 부분을 맡았고, 애니매이션 매직이 그림과 엔진 부분을 맡았다. 이 프로젝트는 블리자드로서도 지금까지 진행했던 외주 제작 중 가장 복잡한 작업이었고, 초반에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발은 점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블리자드는 이번 프로젝트를 어드밴처 장르의 팬 입장에서 접근했다. 워크래프트가 듄 II를 모방했던 것처럼,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스는 원숭이섬의 비밀이나 풀 쓰로틀과 같은 고전 어드밴처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오마주였던 것이다. 개발진은 기존의 어드밴처 장르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 장르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워크래프트 게임들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보다 멋지고 재치있게 엮어내는 데 집중했다.

특히 개발을 주도했던 빌 로퍼와 크리스 멧젠은 워크래프트의 오크를 다른 판타지 게임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 블리자드의 호드는 잔인하고 야만적이었지만, J.R.R 톨킨의 책에서 등장하는 미친 괴물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부심있고 고결한 전사들이었고, 자신들만의 문화와 학문 그리고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들 역시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는 종족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워크래프트 어드밴처는 이러한 선과 악의 흐릿한 경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의 주인공은 스랄(Thrall)이라는 젊은 오크로, 그를 길러준 블랙무어라는 인간은 그를 이용해 오크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자 하는 인물이다. 스랄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가장 나쁜 부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자신이 속한 오크족의 전통을 찾아 인간에게 억압받는 동포들의 저항을 이끌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러한 스토리는 호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음은 물론, 비욘드 더 다크 포털 이후 아제로스에 갇힌 오크족의 봉기에 대한 배경을 마련해주는 장치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스토리 자체는 어둡고 장대하지만, 이를 이끌어가는 네러티브 자체는 블리자드가 닮고자 했던 개발사인 루카스아츠 스타일의 유머와 재치가 가미된 것이었다. 이상하고도 유쾌한 캐릭터들과 시대가 뒤죽박죽인 듯한 대중 문화 패러디들은 플레이어의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유머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크게 부각된 파트가 아니었지만,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에서만은 이 부분이 가장 앞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계획 상으로 1997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매되어야 했던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스는 다른 많은 블리자드의 게임들이 그러했듯 예정된 발매일을 넘기고 말았다. 어드밴처스가 개발되고 있는 동안, 루카스아츠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고전 2D 어드밴처의 정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원숭이섬의 저주를 발매한다. 또한 3D로의 야심찬 첫번째 발걸음이었던 그림 판딩고의 제작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블리자드의 자신감은 게임 개발이 마무리되어가면서 오히려 작아져만 갔다. 이미 아이디어는 소진되고 디자인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프로젝트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위해 블리자드에서는 전설적인 인터렉티브 픽션 디자이어인 스티브 메렛즈키(Steve Meretzky)를 고용한다. 몇 주 간의 길고 고된 시간 끝에, 메렛즈키는 각본 일부의 재작성, 스크립트의 수정, 그리고 퀘스트 재조정이라는 처방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이미 늦어진 발매일은 더 연기되어야 했다. 그러나 블리자드는 이러한 처방에 따르는 것만이 그들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E3가 다가오면서 블리자드는 자신들의 결과물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검토했는데, 이미 그들의 자신감은 산산히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원숭이섬의 저주가 멋지게 보여준 수작업 애니매이션은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의 그것에 비해 이미 한 걸음 앞서 있었고, 그림 판딩고에 비하면 자신들의 프로젝트는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E3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블리자드는 결국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스의 발매를 포기한다. 그들의 작업 결과에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미 팬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시점이 지나버렸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이 시점에서는 차라리 개발을 마무리하고 게임을 발매하는 편이 보다 쉽고 수익에도 도움이 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블리자드의 철학은 분명했다. 만약 최고가 아니라면, 결코 팬들에게 내놓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어드밴처스를 워크래프트의 공식 세계관 속에 남겨두었다. 어드밴처스의 스토리는 소설 로드 오브 클랜스(Lord of Clans)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스랄의 여정과 오크의 반란은 워크래프트 III의 배경 스토리가 되었으며, 어드밴처스의 여러 캐릭터들 역시 워크3를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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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비스 파스 (Travis Fahs) / 번역: 페이비안 / 원문 게시일: 2009.8.18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출처 표기를 조건으로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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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하시면 워크래프트 IV가 10년 내에 등장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