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단순히 더 넓은 세계와 더욱 정교해진 게임플레이만을 선사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스프라이트의 크기는 무척 작았고, 아직 스퀘어가 새로운 기기의 성능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도 아니었지만, 슈퍼패미콤으로 등장한 파이날 판타지 IV의 그래픽은 8비트 시절의 RPG들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화면을 보여주었다. 또한 슈퍼패미콤의 사운드를 통해 우에마츠의 음악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전 게임의 삑삑거리는 단순한 소리에서 샘플링을 통해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방불케 하는 웅장한 음악으로 업그레이드된 FF4의 사운드트랙은 지금까지의 RPG에서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이었다.

16비트 하드웨어에 집중하기로 한 스퀘어의 선택은 성공을 거두었다.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가 16비트로 넘어오기까지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와중에 파이날 판타지라는 브랜드 네임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까지 틈새시장에 불과했던 북미에서의 콘솔 RPG 시장에 대해서도 에닉스가 미국 지사를 철수시킨 반면, 스퀘어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퀘어는 파이날 판타지가 미국 아이들에게 콘솔 RPG의 대명사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FF4는 북미에서 Final Fantasy II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는데, 이는 현지화 작업이 결실을 맺지 못한 2편과 시도조차 되지 않았던 3편의 존재를 지우는 작업이었지만 스토리 상으로 작품 간 연관성이 거의 없는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의 특성 상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북미판 파이날 판타지 II의 번역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곳곳에 누락과 오역이 있었고, 의도적이지 않게 웃음을 자아내는 부분까지 있었지만, 이 작품은 제네시스용 판타지 스타 II를 가볍게 제치고 SNES를 RPG 팬들의 선호 게임기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임이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스퀘어에서는 북미 시장만을 타겟으로 하는 RPG 게임의 제작에 들어간다. 

너무 쉬워서 북미 게이머들도 할 수 있는 게임

파이날 판타지 1편과 2편은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콘솔에서 RPG 장르 자체가 아직 틈새 시장에 불과한 상황에서 파이날 판타지가 거둔 성공으로 인해 북미에서는 '콘솔 RPG = 파이날 판타지'라는 공식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경향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해 스퀘어는 자사의 다른 RPG 게임들의 북미판에 파이날 판타지라는 브랜드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SaGa 시리즈는 파이날 판타지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성검전설은 파이날 판타지 어드밴처라는 이름으로 북미 시장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짜피 오리지널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에서도 스토리 상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은 브랜드 강화에 매우 적절한 행보였다.

이러한 전략으로 스퀘어의 북미 시장에서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콘솔 RPG를 주류 장르로 끌어올리기 위해 스퀘어에서는 북미 시장만을 타겟으로 한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북미 게이머라면 누구나 RPG의 마수에 걸려들게끔 만드는 마치 트로이의 목마와도 같은 게임을 목표로 한 이 게임의 제목은 파이날 판타지: 미스틱 퀘스트였다.


당시에는 북미 시장에서 RPG 장르가 크게 각광받지 못한 이유가 체계적으로 분석되거나 연구된 바 없었지만, 스퀘어는 하나의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북미 게이머들이 일본 게이머만큼 게임에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미 파이날 판타지 IV의 북미판을 내면서 게임 난이도를 상당히 낮춘 바 있는 스퀘어였지만, 이번에는 이러한 부분을 좀 더 강화하여 세상에서 가장 쉬운 RPG를 만들고자 했다. 일본 개발진들은 스퀘어 미국 지사의 인력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레벨 업도 쉽고 무기 가격도 엄청 낮은 그런 수준을 넘어, 게임 전개 자체가 완벽하게 선형적인데다가 마을과 마을 사이의 이동은 점선을 따라 움직이고, 게이머가 조작하는 캐릭터 하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캐릭터는 컴퓨터가 조작해주는 게임이 탄생했다. RPG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도가 심하게 제약된 반면, 느린 전개와 턴 기반의 게임플레이만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전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게임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은 판매량을 보여주었지만, 스퀘어에서 노렸던 것처럼 북미에서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의 흥행몰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다음 해, 일본에서도 미스틱 퀘스트가 파이날 판타지 USA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저연령대의 게이머들에게는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임에는 분명했으며 몇몇의 게이머들에게는 상당한 호감을 주는 작품이었지만, 스퀘어에게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 사례가 되었다. '더 쉽게'라는 것은 해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향후에 북미에서 발매되는 작품들은 이에 따라 난이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북미에서는 미스틱 퀘스트가 발매될 무렵, 스퀘어에서는 1992년 12월 발매를 목표로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한창 개발되고 있었다. 파이날 판타지 V는 시리즈 사상 가장 심오한 게임플레이를 선보일 작품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북미에서는 미스틱 퀘스트가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스퀘어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게임이 북미 시장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이러한 판단이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생각이기도 했다. FF5에서는 기존의 '잡 시스템'에 새로운 '어빌리티 시스템'이 연계되어 파티의 어떤 캐릭터든 22개의 다양한 클래스를 넘나들면서 톡특한 특성과 장비, 그리고 스탯을 쌓아갈 수 있었다. 하나의 클래스에서 어느 정도 레벨 업을 하면 캐릭터가 다른 클래스로 전직할 때에도 특정 '어빌리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게이머는 여러 가지 클래스를 조합하여 매우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FF2에서 레벨 업 시스템의 복잡성은 게이머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던 반면, 이번에 도입된 새로운 시스템은 게임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스퀘어는 또한 새로운 클래스 시스템으로 인해 다시 이름 없는 일반적인 캐릭터로 돌아가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다섯 명의 캐릭터들에게 각자에게 어울리는 클래스 복장들을 하나하나 디자인해야 했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게이머의 캐릭터들에 대한 몰입도는 한 차원 높아졌다. 스토리의 시작은 네 개의 크리스탈을 찾아 나서는, 마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의 초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북미에서 파이날 판타지 V의 부재는 팬들에게 큰 불만으로 다가왔다. FF2와 3의 시절에는 그 빈자리를 인식하기에 아직 시리즈에 대한 인식도가 낮았지만, FF5에 이르러서는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는 멋진 게임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 게임 관련 매체에서도 일본판 FF5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북미 팬들에게는 이러한 찬사가 쉽게 낫지 않는 상처로 다가왔다. 1997년 10월, 파이날 판타지 VII의 등장하여 RPG의 지형 자체를 완전히 갈아 엎기 한 달 전, RGPe라는 이름의 해커 그룹이 FF5를 자체적으로 현지화한 첫번째 버전을 선보이게 된다. 팬에 의한 현지화, 그것도 이렇게 대작을 끝까지 마무리한 사례는 사상 처음이었으며 함께 등장한 파이날 판타지 II의 패치와 함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는 북미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인터넷에 능숙한 몇몇 북미 게이머들 무리에서 큰 관심을 얻게 된다.

스퀘어에서도 결국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파이날 판타지 엔솔로지를 발매하면서 공식적으로 FF5를 북미 시장에 선보인다. 많은 게임평론가들이, 스퀘어가 그렇게나 꺼려 했던 복잡성으로 인해 엔솔로지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렸지만, 그 시기는 이미 너무나 늦어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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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러스 멕러린(Rus McLaughlin) / 번역: 페이비안 / 원문 게시일: 2009.6.26 / 출처: IGN Retro

* IGN.com으로부터 출처 표기를 조건으로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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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북미판 게임들이 오히려 더 난이도 높은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면... 참 격세지감 들게 하는 내용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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