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주년을 맞이한 게임회사 닌텐도

게임라이프/번역 2009. 9. 30. 13:54 Posted by 페이비안
다음 달이면 액티비전이 설립 30주년을 맞는다. 30년이라는 시간은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볼 때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다. 하지만 액티비전이 업계의 최고령 고참은 결코 아니다. 포드의 모델 T 자동차보다 오래된 비디오게임 회사가 있다면 믿겠는가? 바로 1889년 9월에 창립된 닌텐도가 그렇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고 고작 2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닌텐도라는 회사는 처음으로 그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따져서 닌텐도가 비디오게임 산업을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였지만, 닌텐도의 120년 역사는 언제나 게임 산업과 함께였다. 창업자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작은 규모의 화투 회사로 닌텐도를 시작했다. 화투는 당시 도박에 사용되던 서양식 카드를 대체하고자 일본정부가 정책적으로 승인한 게임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안 덕분에 닌텐도의 화투는 큰 인기를 얻었고 야마우치는 닌텐도를 일인기업에서 다수의 고용인을 갖춘 중견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다.

닌텐도가 카드 놀이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회사는 야마우치 가의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되었다.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그의 사위인 세키료를 입양하여 1929년에 회사를 물려주었다. 양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은 야마우치 세키료도 아들이 없었는데, 그 역시 그의 사위에게 닌텐도를 이어받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사위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려 세키료는 대신 그의 슬하에서 자란 손자, 히로시를 다음 후계자로 지목한다. 1949년 야마우치 세키료가 세상을 떠나자 야마우치 히로시가 닌텐도의 새로운 사장이 되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역시 수 년 동안은 카드 놀이 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디즈니와의 협력을 통해 미키마우스 등 디즈니 캐릭터를 이용한 카드를 제작하였는데, 당시 전후 미군정 하에 있던 일본 사회에서는 서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던 시기였고 덕분에 디즈니 테마의 카드는 닌텐도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닌텐도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야마우치는 회사를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닌텐도는 식품 제조업이나 택시 사업에도 뛰어들었으며 심지어는 러브호텔 체인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대체적으로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닌텐도의 뿌리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장난감 사업에서는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닌텐도가 본격적으로 비디오게임 분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닌텐도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정비원과 야마우치와의 만남이었다. 그 정비원의 이름은 요코이 군페이, 나중에 게임보이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게 되는 인물이었다.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은 닌텐도가 비디오게임 분야에서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한 연표로, 120주년이 되는 금년 9월까지 닌텐도에 어떤 굵직한 일들이 일어났으며 주요한 타이틀이 어떤 것들이 발매되었는지를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1970: 우연치 않게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늘어나는 팔 장난감을 보게 된 야마우치가 요코이 군페이의 장난감 개발자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요코이의 팔 장난감은 닌텐도를 통해 대량생산되었으며 발매 즉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요코이는 닌텐도 내 개발 및 디자인 부서로 자리를 옮겨 라이트 건, 러브 테스터, 전자 원숭이통 퍼즐 등 다양한 장난감을 개발한다. 계속되는 히트 제조기로서 그는 회사 내에 가장 신임받는 직원 중 하나가 되었다. 


1975: 비디오게임이 전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임을 인지한 닌텐도는 마그나복스 오딧세이와 라이센스를 맺고 기기를 일본에 선보였다. 마그나복스 오딧세이는 일본에서 아주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닌텐도가 비디오게임 개발에 좀 더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7: 미야모토 시게루가 아티스트 겸 디자이너로 닌텐도에 고용된다.

1980: 기차에서 한 직장인이 계산기를 가지고 노는 것에 착안하여, 요코이 군페이가 LCD 스크린이 장착된 휴대용 게임기 시리즈인 게임&워치 라인을 개발한다. 게임&워치 라인은 진화를 거듭하여 현재의 DS와 무척 유사한 모양의 듀얼 스크린으로 발전하게 된다.

1981: 레이더 스코프 아케이드 게임의 실패 후, 닌텐도는 미야모토로에게 레이더 스코프 캐비닛에 들어갈 새로운 게임의 개발을 맡긴다. 이 프로젝트는 요코이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는데, 미야모토는 뽀빠이의 라이센스 취득에 나서지만 실패하고 그 대신 돈키 콩이라는 게임을 만들어낸다. 돈키 콩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은 나중에 닌텐도를 대변하는 아이콘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특히 돈키 콩에서는 단순히 점프맨이라고 불리우던 캐릭터인 마리오는 비디오게임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83: 북미에서는 아케이드 시장이 몰락하고, 닌텐도는 일본에서 패미콤으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진입한다. 카트리지 교환형 게임기였던 패미콤은 초기에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미야모토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내놓으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지금도 게임 산업을 규정하는 중요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게임으로 인해 비디오게임계의 선구자로서 미야모토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진다.

1985: 닌텐도가 북미에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이라는 이름으로 패미콤을 선보인다. 원래는 아타리를 통해 NES를 유통할 예정이었으나 아타리가 거절하여 닌텐도가 직접 북미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NES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를 앞세워 발매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에서 비디오게임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켰다. 같은 해, 닌텐도는 일본에서 R&D 1, 2, 3의 3개 부서로 된 내부 개발팀을 출범한다. R&D 1은 요코이 군페이가 지휘를 맡았으며 메트로이드 등 여러 히트 게임을 개발하였다.


1988: 북미에서 성공을 거둔 펀 클럽 뉴스레터에 이어, 닌텐도는 닌텐도 파워 매거진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닌텐도 파워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지만 닌텐도가 아닌 퓨처라는 회사에서 출간되고 있다.

1989: 요코이 군페이의 지휘로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보이가 개발된다. 게임보이는 발매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번들로 포함되었던 선풍적인 인기의 퍼즐 게임 테트리스였다. 슈퍼 마리오 랜드 역시 전세계적으로 1400만 장의 판매를 올리며 게임보이의 성공에 큰 동력을 제공하였다. 게임보이 시리즈는 게임보이 포켓, 게임보이 컬러, 게임보이 어드밴스, 게임보이 미크로 등의 라인업을 통해 2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1990
: 닌텐도가 북미 시장에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를 발매한다. 이 작품은 2006년 위 스포츠가 그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번들로 제공되지 않은 타이틀 중 가장 많은 판매량(1800만 장)을 올린 게임이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일본에서 1988년에 발매되었지만 내부 칩 물량 부족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의 발매가 늦어졌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의 북미 발매는 사실상 90분짜리 닌텐도 광고라고도 할 수 있었던 '더 위자드'라는 영화를 통해 널리 홍보되었다. 이 게임은 지금까지도 NES용으로 발매된 게임 중 (번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남아있다.


1990/91: 라이벌이었던 세가의 제네시스(메가드라이브)가 화려하게 등장한데 이어, 닌텐도는 1990년에 일본에서 슈퍼 패미콤을 선보인다. 북미에서는 1991년에 슈퍼 NES(SNES)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번들로 제공된 슈퍼 마리오 월드는 매체와 팬들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6비트 시대 초반에 흐름을 주도했던 세가는 그 덕분에 북미 비디오게임시장의 상당한 부분을 닌텐도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지만, 후반기에 이르러 돈키 콩 컨트리와 같은 명작 게임들 덕분에 닌텐도는 결국 비디오게임계의 왕좌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1992: 닌텐도와 소니가 물밑에서 SNES용 CD 주변기기의 개발을 논의하였지만 1991년 CES를 통해 협상 결렬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소니와 닌텐도의 협상은 SNES 카트리지 슬롯을 채용한 새로운 게임기 개발과 관련하여 199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다. 소니는 CD 기반 게임기 제작 기술에 대한 미련과 공개석상에서의 망신을 잊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1995년에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씨앗이 되었다.

1996: 닌텐도가 전세계에 닌텐도 64를 발매하다. 이 새로운 게임기는 CD 대신 카트리지를 채용했는데, 이는 불법복제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닌텐도 64에는 당시 전세계를 선도하는 CG 기술을 자랑했던 실리콘 그래픽스의 기술이 사용되었다. 동시 발매 타이틀이었던 슈퍼 마리오 64는 발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3D 게임을 위한 기초를 정립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소프트웨어 라인업, 고가의 카트리지, 파이날 판타지와 같은 중요한 프랜차이즈 확보 실패, 그리고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전세계적 성공으로 인해 닌텐도의 비디오게임 시장 장악력은 급속히 쇠약해지고 만다. 당시의 하드웨어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전세계적으로 1억대 이상 팔려나간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려 닌텐도는 이인자의 자리에 내려앉게 되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사회 현상으로까지 불리우는 포켓몬스터가 발매되어 다소 침체되었던 게임보이에 다시금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97: 요코이 군페이가 자동차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닌텐도 내에서 그의 입지는 1995년 버추어 보이 실패 이후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었다.

1998: 닌텐도에서 게임보이 컬러를 발매한다. 그러나 북미 시장에서 게임보이 시리즈에 더 큰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은 포켓몬스터였다. 포켓몬스터의 열기는 전세계로 확대되어 닌텐도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같은 해 닌텐도에서 N64용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를 발매하는데, 이 작품은 닌텐도 64에서 발매된 게임 중 최고의 게임으로 꼽히고 있다.

2001: 닌텐도가 게임큐브를 발매하면서 결국 디스크 매체를 수용하게 된다. 게임큐브는 마리오 게임 없이 발매된 최초의 닌텐도 게임기였다. 플레이스테이션 2에 비해 1년이 늦었던 게임큐브는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내놓은 새로운 게임기인 Xbox와도 경쟁해야만 했다. 게임큐브는 결국 2,200만대에 미치지 못하는 판매량으로 닌텐도에서 내놓은 게임기 중 가장 적게 팔린 기기로 남게 되었다.


같은 해 발매된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다양한 제작사들이 게임을 내놓으면서 게임큐브보다는 훨씬 좋은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성공에는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사하는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영향도 컸다.

2002: 야마우치 히로시가 1949년부터 계속되었던 닌텐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은퇴한다. 그가 사장이었던 기간 동안 닌텐도는 카드 놀이 회사에서 비디오게임업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의 네번째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할 연구소라는 비디오게임 제작사에서 근무하다 2000년부터 닌텐도의 기획 부문장을 맡았었다.

2004: 닌텐도에서 듀얼스크린과 터치스크린 입력방식을 채용한 닌텐도DS를 발매한다. 닌텐도DS는 기존 게임기 라인업과 차별되는 제3의 기둥으로 기획되었으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결국 게임보이 라인을 대체하게 된다. 닌텐독스나 두뇌 트레이닝 등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게이머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계층에 어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비디오게임의 저변을 넓히고자 했던 닌텐도의 전략이 DS의 가장 큰 성공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2005: 닌텐도는 게임큐브의 후속작이자 닌텐도 위를 선보이면서 라이벌인 소니 및 마이크로소프트와 완전히 다른 뱡향성을 지향하였다. 위 리모트의 모션 콘트롤을 내세운 이 새로운 기기는 닌텐도가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업계 전체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었다.

2006: 2005년 E3 컨퍼런스에서 인상적인 발표를 통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레지 필스-에이미가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으로 승진한다. 닌텐도는 DS의 첫번째 업그레이드 버전인 DS 라이트를 발매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닌텐도 위가 위 스포츠를 번들로 북미에서 발매되어 물량 부족을 동반하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 다음 해, 닌텐도는 먼저 발매된 Xbox360을 가볍게 제치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기의 자리를 차지한다.


역주: 2006년에 한국에서는 한국닌텐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한국 닌텐도는 닌텐도DSL을 발매함과 동시에 게임과는 관계없을 듯한 연예인들이 즐거운 모습으로 게임을 즐기는 장면을 담은 광고를 TV 및 각종 일반 매체에 선보이며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NDSL 없이는 왕따가 될 정도라는 말이 돌만큼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유통경로 역시 전통적인 용산전자상가 등에 의존하지 않고 마트와 서점 등을 적극 공략하고, 발매하는 모든 타이틀에 대한 완벽한 한글화로 한국에서도 기존 비디오게이머들보다는 비게이머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2009: 닌텐도가 닌텐도 DS의 또 다른 업그레이드 버전인 DSi를 발매한다. 닌텐도 위는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시장을 장악하는 강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25년의 시간동안, 닌텐도는 성공과 실패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였다. 돈키 콩, 패미콤, 게임보이의 성공으로 하늘 끝까지 오르는가 하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소니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수난 시대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DS와 위를 통해 기존에 스스로를 게이머라 생각치 않았던 층을 공략하는, 그야말로 회사의 사운을 건 모험을 통해 닌텐도는 전세계 비디오 게임계의 왕좌를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아마도 120주년을 맞이하며, 닌텐도는 이러한 모험과 성공을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글: 르바이 부케넌 (Levi Buchanan) / 번역: 페이비안 / 원문 게시일: 2009.9.29 / 출처: IGN

* IGN.com으로부터 출처 표기를 조건으로 전문 번역 허가를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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