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알바에 대한 오해와 진실

알림판 2009. 4. 7. 08:13 Posted by 페이비안

요새 같은 불경기에 용돈이라도 벌어보고자 투잡할 거리를 기웃거리는 직장인이나 몸이 덜 힘든 알바거리를 찾는 대학생들에게 번역 알바는 구미가 당기는 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어짜피 남는 시간 활용해서 영어 실력도 쌓고, 돈도 벌고.. 그러나 세상 다른 일 모두 그렇듯이, 남의 돈 받아가기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번역 알바에 대해서 쉽게 오해하는 몇 가지 부분들에 대해 짚어보자.

영어 실력을 쌓겠다?!

번역은 일이다. 일을 통한 경험이라는 것이 쌓일 수는 있지만, 이 경험값은 흔히 말하는 영어 실력하고는 거리가 있다. 애초부터 영어 실력이 부족하면 번역을 한다고 실력이 향상되는 건 아니다. 본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어설픈 결과물만 나올 뿐이다. 번역이 가능한 기본적인 영어 실력이 이미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번역의 일관성이라던지, 특정 분야에서 적절한 어휘의 선택, 작업의 효율성 등이 좀 향상될 순 있지만, 대폭적인 실력의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국어 실력이 사실 좀 더 중요한 영한 번역의 경우는 제쳐두고 생각하더라도, 좀 더 잘 팔리는(?) 알바가 되기 위해서는 한영 번역이 가능해야 하는데, 한영 번역으로 영작 능력이 향상될까? 물론 일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의욕적으로 좀 더 멋진 표현이 없을까 하고 여기 저기 참고문헌을 뒤지면서 공부를 할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현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작문을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여담이지만, 한영 번역을 해달라고 보내오는 원문을 보면, 제대로 잘 쓴 글이 오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한글을 다시 뜯어고치는 작업부터 하고 있자면 내가 한한 번역을 하는지, 한영 번역을 하는지, 암호 해독을 하는지 아리송해질 때도 많다. 도대체 몇 푼을 벌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하다.

영어 공부라고 생각했다면 차라리 해외 신문사 컬럼이나 에세이에서 좋은 표현을 공부하고 영어 일기를 쓰는 편이 실력 향상에는 훨씬 도움이 될 뿐더러 기분도 한결 즐거웠을 것이다. 영어 공부로서의 번역은 효율이 아주 떨어지는 선택이다.

돈을 벌겠다?!

혹시 번역업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단가가 번역가에게 모두 지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은 없겠지? 처음 일을 시작하면 잘 받아봐야 영한은 단어당 30~40원, 한영은 단어당 40~50원 정도이다. 어림잡아 A4 장당 만 원 내외. 분량이 많은 프로젝트인 경우 단가는 더 내려간다.

그럼 A4 한 장 번역하는 시간은? 능력과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쉬는 시간이랑 중간 중간에 딴 짓 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1시간이라고 치자. 그럼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주 5일 일하면 얼마나 벌까? 일주일에 40만원, 한 달에 200만원, 연봉으로 치면 2400만원, 우와 번역으로도 먹고 살만 하네?


천만에 말씀. 번역 알바에게 꾸준하게 이 정도의 일감이 주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이 있을 때는 왕창 몰려오고 없을 때는 정말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번역 작업으로 보내는 하루 8시간 주 5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업무량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쉬는 시간이 살짝 길어져서 A4 한 장을 2시간에 한다고 치면 바로 연봉이 반으로 깎기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작업이 끝난 후에 바로 번역료를 정산해 주는 경우도 많지 않다. 지금 같은 불경기에는 규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업체조차도 지급 기한을 반 년 이상 미루는 경우도 있다. 어떤 업체들은 지급 기준 자체가 애매한 경우도 있다. 악질적으로 띄어쓰기를 다 무시하고 한 문장을 한 단어라고 박박 우기는 업체도 있다. 농담 같은가? 전화통화를 수차례 하고 담당자와 해당 파일을 두 세 번 주고 받은 후에야 정정할 수 있었던 실제 경험이다.

결정적으로, 번역 알바 중에서 제대로 된 계약서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계약서 써주는 업체는 또 얼마나 될까. 계약서 받았다고 해서, 다음 달, 다다음 달로 미루는 번역료 몇 푼을 가지고 소송을 할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돈은 정말이지 안 떼이기만 하면 다행이다.

남는 시간을 활용하겠다?!

위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번역작업은 다른 여타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일정과의 싸움, 마감과의 싸움이다. 자기 편한 시간에 원하는 분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애초부터 안되는 것이다. 일이 많을 때에는 밤을 새서 납품을 맞추어야 할 때도 있는 반면, 없을 때는 본인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다 소용 없다. 게다가 의뢰가 들어오면 분량과 금액에 솔깃해서 본인의 가용 시간은 생각치 않고 덜컥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아서 이거 뒷수습하다보면 몸도 조금씩 상하게 된다.


여가 시간에는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풀 취미를 즐기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편이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에 훨 낫다. 건강하면 병원비 덜 드니, 길게 보면 더 경제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하겠다면...

누가 뭐래도 번역하는 일 자체가 정말 즐거우면, 정말 즐길 수 있을 거 같으면, 일단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을 덧붙인다.

처음부터 믿을만한 업체와 일해라

어디가 과연 믿을만한 업체인지... 워낙에 중소 업체가 난립하는 터라 옥석을 가리기 참 힘들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검색한 업체 중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곳, 구인 광고를 너무 오랫동안 내거나 너무 자주 내는 업체 (프리랜서 번역가들이 참지 못해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업체 등은 최소한 피하는 게 좋다.

시간과 목적을 명확히 하라

번역 알바를 할 수 있는 짜투리 시간이 하루에 얼마쯤 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금액을 생각하고 알바를 하는지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해두고, 특히 시간에 있어서는 지원할 때 명확하게 밝혀두는 편이 나중에 서로 편하다.

조건을 명확히 하라

계약서를 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본인의 단가 수준, 번역 완료 시 지급 기준일 등에 대해서는 e-mail이라도 기록을 남기자. 그리고 번역료 지급에 대한 약속을 어기는 경우, 그 업체와의 거래는 단호하게 잘라야 한다.